「〈카포〉의 트래블링」: 부조리한 세상, 부도덕한 영화

〈비판 리뷰 1〉 다섯 번째: 세르주 다네, 「〈카포〉의 트래블링」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카포〉의 트래블링」을 읽었다. 그가 1992년에 쓴 글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내 선사시대의 기록이다. 여기서 다네는 〈카포〉의 한 장면—보다 정확하게는 〈카포〉의 한 장면에 대한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의 묘사—으로부터 시작해 알랭 레네의 〈밤의 안개〉와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를 거쳐 “이 영화가 나와 같은 나이였기 때문에 내가 ‘현대 영화’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동시대 영화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텔레비전의 시대로 이행한다. 이 이행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를 맴돌고 있다. 인류에 대해 인류가 행한 반인류적 악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영화가 있다. 그는 “영화는 현재의 예술”이라고 선언한 뒤, 곧이어 바로 그러한 이유로 영화에 사망 선고를 내린다. 그가 보기에 “이미지는 더 이상 ‘본 것’과 ‘보여주는 것’이라는 변증법적 진리의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프로모션이나 광고, 말하자면 권력의 편으로 넘어가버렸다.”

다네가 이 짧지 않은 한 편의 글을 자신이 열일곱 살 때 읽은 리베트의 비평 중 단 한 문장—“〈카포〉에서 리바가 스스로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을 보자—바로 이 순간, 마지막 프레임의 앵글에 정확하게 올려진 손을 잡으려고 갖은 신경을 쓰면서 시체를 잡기 위해 앙각으로 트래블링-인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 바로 이 사람은 가장 깊은 경멸만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을 언급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듯이, 나는 이 글을 다네의 한두 단락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Since there are only a few films in which nobody dies, there were many occasions to fear and tremble. Indeed certain filmmakers weren’t imposters. Again, in 1959, Miyagi’s death in Ugetsu nailed me to the seat of the Studio Bernard theater. Mizoguchi filmed death as a vague fatality that one saw could and could not happen. The scene is memorable: in the Japanese countryside ravenous bandits attack travelers and one of them kills Miyagi with a spear. But he almost does it inadvertently, teetering, moved by a bit of violence or an idiotic reflex. This event seems so accidental that the camera almost misses it, and I’m convinced that all spectators of Ugetsu have the same crazy, almost superstitious idea that if the camera hadn’t been so slow the event would have happened “out of frames,” or who knows, it might not have happened at all. 
Is it the camera’s fault? In dissociating the camera-movement from the actors’ gesticulations, Mizoguchi proceeded in precisely the opposite manner of Kapo. Instead of an embellished glance, this was a gaze that “pretended not to see,” that preferred not to have seen and thus showed the event taking place as an event, that is to say, ineluctably and obliquely. An absurd and worthless event, absurd like any accident and worthless like war—a calamity that Mizoguchi never liked. And event that doesn’t concern us enough to even move past it, shameful. I bet that at precisely this moment, every spectator of Ugetsu absolutely knows the absurdity of war. It doesn’t matter that the spectator is a westerner, the movie Japanese, and the war medieval: it’s enough to shift from pointing with the finger to showing with the gaze for this knowledge—the only knowledge cinema is capable of, as furtive as it is universal—to be given to us. 
아무도 죽지 않는 영화가 드물었기 때문에 공포하고 동요할 만한 일은 많았다. 사실 몇몇 감독은 사기꾼이 아니었다. (또다시) 1959년에, 〈우게츠 이야기〉에서 미야기의 죽음이 베르나르 스튜디오 극장의 좌석에 나를 못박힌 듯 꼼짝없이 앉아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조구치는 일어난 것으로 또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모두 볼 수 있는 모호한 재난으로 죽음을 그렸다. 이 장면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일본의 어떤 시골에서 탐욕스러운 도적떼가 여행자들을 공격하고 도적 중 하나가 미야기를 창으로 찔러 죽인다. 그런데 이 도적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비틀거리며, 폭력적이면서도 백치 같은 반사 동작에 의해 이 살상을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너무 갑작스러워 보이는데 그때문에 카메라는 거의 그것을 놓칠 뻔한다. 나는 만약 카메라가 그토록 천천히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이 “프레임 바깥에서” 일어났거나, 또는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미신에 가까운 생각을 〈우게츠 이야기〉를 본 모든 관객이 똑같이 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카메라의 잘못인가? 미조구치는 카메라가 배우들의 몸짓과 분리된 채 움직이게 하면서 〈카포〉와는 정반대로 나아갔다. 이것은 장식적인 응시가 아니라 오히려 “못 본 체하는” 응시이고, 사건을 보지 않으려 하며 따라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사건으로서, 말하자면 그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대신 비스듬히 보여준다. 미조구치가 결코 좋아하지 않았던 재난은 부조리하고 무가치한 사건—모든 사고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하고 전쟁과 같이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수치심에 휩싸인 채 그것을 지나쳐 갈 만큼 걱정시키지는 않는 것. 나는 이 순간만큼은 〈우게츠 이야기〉의 모든 관객들이 전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관객이 서양 사람이고, 영화는 일본에서 온 것이며, 그것이 중세의 전쟁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손가락을 뻗어 가리키지 않고 시선을 통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지식—시네마가 유일하게 감당해낼 수 있는, 보편적이면서도 은밀한 이 지식—은 우리에게 충분히 전달된다.

다네가 〈카포〉를 보지 않은 채, 그보다 중요하게는 자신이 〈카포〉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완전히 만족한 채 글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미조구치 겐지의 〈우게츠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우게츠 이야기〉를 보지 않았지만 그런 대로 거기에 만족하는 편이다. 그 때문에 이 두 단락이 기억에 남았다. 말하자면 이 두 단락이 다네와 나를 잇는 고리인 셈이다.

다네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우게츠 이야기〉의 한 장면은 리베트와 다네가 문제시하는 〈카포〉의 트래블링과는 영화의 폭력성에 관해 정반대의 시선 또는 태도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죽음이란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이며 때로는 거의 일상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카포〉의 엄격하게 계산된, 아름다운 트래블링이 영화가 어딘가에 내몰린 사람의 마지막 선택 즉, 자살이라는 가장 끔찍한 사건을 너무나 선정적으로 보여준다면 〈우게츠 이야기〉의 카메라의 독특한 움직임은 일어나는 것을 결코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되도록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꼭 보여주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 자체이며 따라서 윤리적이다.

세르주 다네가 〈카포〉를 보지 않고서도 완전히 만족한 까닭은 그 트래블링에 대한 리베트의 설명만으로도 그것이 너무나 비윤리적이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이 장면에 대한 다네의 설명만으로도 그것이 윤리적이라는 데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게츠 이야기〉를 보지 않았는데도 거기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조구치 겐지가 택한 이 방식이 영화가 폭력성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 (다네가 그랬듯이) 평생을 바칠 만한 가이드라인이 될지는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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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이면서도 힘있는 다네의 이 글을 읽으며, 나는 은연중에 다네와 나를 비교했다. 다네가 상기하는 몇몇 기억들이 내 자신의 체험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가령, 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교사가 라틴어 수업 시간에 라틴어 수업 대신 몇 편의 도발적인 영화를 상영했던 것처럼, 나의 학교 생활에도 ‘영화’--이것을 영화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나의 사전에서 ‘영화라고 할 수 없는 영화’를 부를 만한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는 있었다. 초등학교에서는 가끔 남는 수업 시간에 선생이나 학생들 중 누군가가 빌려온 비디오 테이프를 보곤 했다. 지금에 와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 ‘문화’는 적어도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었다고 믿고 있는데, 왜냐하면 나는 집이 자주 이사하면서 따라서 학교도 수없이 옮겨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최소한 한두 번씩 그런 체험을 한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비디오 테이프 중 가장 자주 선택되고, 거기에 대해 보통 누구도 드러내 놓고 격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즉, 어쩌면 ‘보편적인’ 영화라고 암묵적으로 선언되었던 것들은 장르로 말하자면 바로 호러 무비였다. 나는 그런 선택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의 강제적으로 관람했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그 영화들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으며, 오히려 그 영화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모른 체하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스스로 원해서 호러 무비를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호러 무비 외에도—완전히 동일한 맥락에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지만—나를 적잖이 괴롭게 하는 영화들은 또 있다. 호러 무비와 한 식구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 피 튀기는 슬래셔 무비가 대표적이다. 호러 무비나 슬래셔 무비에서는 끊임없이 사람이 죽는다. 이들 영화는 마치 인물을 죽이는 것이 그 본연의 목적이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죽음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사람이 죽기 때문에 영화가 이 장르에 속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영화가 단지 자신이 속한 장르를 존속시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여기에 열광하는 관객들도 분명 존재한다. 사람의 죽음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해서 그것이 호러 무비이거나 슬래셔 무비인 것은 아니다. 분명 영화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현실에서만큼이나 흔한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호러 무비와 슬래셔 무비는 죽음 그 자체를 장르화한다. 다시 말해 이 종류에 속하는 영화들은 많은 경우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영화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재로 죽음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고, 인물들은 거의 무조건 죽는다. 거기서 죽음은 장르를 진행시키기 위해 양식화된 채 소비된다. 심지어는 이들 인물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들을 모아서 죽는 방법에 따라 장면들을 분류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보여지는 것은 일어나는 것인가? 어떤 호러 영화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을 위해 ‘지금 보여지는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등장인물이 소지하고 있는 캠코더에 찍힌 영상으로만 진행되는, 말하자면 형식적인 면에서는 파운드 푸티지 영화를 추구하는 영화다. 이러한 형식은 그렇지 않은 형식과 비교했을 때—그것이 더 ‘무서운지’와는 별개로—관객이 자연스럽게 자신이 보고 있는 영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믿게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정말로 일어나는 일 ‘같은’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다. 반면, 자신이 보여주는 것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느냐의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영화들도 많다. 슬래셔 무비이면서 동시에 컬트 무비, B급 영화에 속하는 영화들에 등장하는 살인 장면들은 전혀 그럴 법하지 않다. 누가 보아도 뻔한 설정이며, 소품이 그대로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관객 또한 이를 충분히 알고 있다. 이런 영화들은 지금 이 내용을 보여주겠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이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거나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안겨주는 데는 되려 무관심해 보인다.

그런데 이 질문—보여지는 것은 일어나는 것인가?—이 보다 더 날카로울 수 있는 부분은 포르노그래피와 포르노그래픽한 영화의 구분에서다. 포르노그래피는 섹슈얼한 대상을 주요한 주제로 삼으면서 보는 이를 성적으로 자극하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는 일차적으로는 포르노그래피와 목적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경유해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포르노그래피는 포르노그래피 그 자체이며,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는 포르노그래피의 표면을 일부 빌려오지만 포르노그래피는 아니다. 경우에 따라 사실상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가 없는 영화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포르노그래피와 포르노그래픽한 영화의 구분은 그것을 보는 결국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좌우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순수 예술을 지향하는 어떤 영화라고 해도 보는 이가 거기서 섹슈얼한 표면만을 본다면 적어도 이 사람에게 이 영화는 포르노그래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포르노그래피의 가장 큰 특징이자 포르노그래피와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를 가장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에서는 화면에 보이는 것이 바로 일어나고 있는 그것이라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에 서사라고 인정할 만한 것은 없다. 서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많은 포르노그래피가 서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이 과연 그 서사에 몰입하는가는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포르노그래피가 보는 이를 성적으로 흥분시키기 위한 것임을 기억한다면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서사 또한 단지 이 목적에 복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까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포르노그래피의 서사는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서사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제한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일할 때, 모든 관심은 카메라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집중된다. 섹스라고 이름 붙여진 보편적이면서도 특정한 범주의 인간 행위에 비주얼을 부여하는 것이 포르노그래피의 존재론이다.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인간 개체가 섹스를 한다는 것이 보여지는 것이며, 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사람은 그 이상을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카메라로 무언가를 촬영한다는 점에서 실은 모든 영화—내러티브 영화라고 불리는 것들까지도—를 이런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가령,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가 감옥에서 꺼내진 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장면을 남궁민수라는 인물이 십수 년간 정말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방금 구출되었으며, 이미 지구상에서 담배는 거의 사라진 지 오래고 남궁민수가 불을 붙이는 저 말보로가 사실상 최후의 담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카메라 앞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집중한다면, 같은 장면을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송강호라는 사람(배우가 그의 직업이다)이 <설국열차>에 남궁민수라는 인물의 역할로 출연해서 감옥에서 막 나온 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담배를 피우는 것을 연기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은 이것이 이 영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유일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지난 한 세기 동안 관객을 교육시켜 온 바에 따라 ‘학습된’ 관객이라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우선 서사 안에서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어느 쪽이 더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포르노그래피가 많은 영화와 다른 점은, 그것의 화면이 가장 우선적으로 이 최초의 단계—(대개) 배우를 직업으로 삼는 어떤 사람이 연기를 하는 것을 카메라로 찍었다—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인간이 섹스를 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 포르노그래피고, 스스로 원해서 포르노그래피를 선택한 관객의 관심사는 섹스하는 장면 그 자체이지 거기 덧대진 서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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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섹스는 인간의 삶에서 빼놓기 힘든 것들이다. 그것은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개인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죽음 또는 섹스를 주요한 소재로 다루는 장르 영화들은 종종 도덕주의적 견해에서 심판 받는다. 호러 무비는 논외로 하더라도 특히 슬래셔 무비에는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잔인무도한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며, 이들 영화는 인물들이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쏟는다. 포르노그래피 또는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는 저급한 것이라고 치부된다. 각각의 결은 다르지만, 결국 그러한 도덕적 논의의 쟁점은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있는 것이다.

이들 영화의 보여주는 방식은 누가 보아도 부도덕한 데가 있다. 그러면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부도덕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을 좋아하는 것일까? 여전히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보여지는 것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이 영화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 영화가 부도덕하다고 해서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사고의 편의를 위한 구별짓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도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다루는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 과제의 목록을 잔뜩 써놓은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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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러 무비, 슬래셔 무비, 그리고 포르노그래픽한 영화를 문자 그대로 외면해왔다.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의문은 말하자면 초등학교에서 호러 무비를 처음으로 봤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 나름대로 오래 고민해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고민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표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카포〉의 트래블링」이 나에게 왔다. 수십 년 전 세르주 다네가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 오래 고민한 흔적. 그는 결연한 어조로 자신이 믿는 영화의 윤리성을 설명하고 텔레비전을 비난했지만 세상은 결코 그 고민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 고민이 글로 써진 지 수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왔고 그가 그토록 싫어한 이미지들로 가득찬 문화 속에서 자랐으며 이제서야 그의 빛바랜 고민을 바라본다. 그래, 이 글은 빛이 바랜지 오래다. 그렇지만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한다. 나는 다네의 도움을 얻어, 그가 하던 고민을 이어받아, 나의 고민을 계속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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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묘사할 때 트래블링을 쓰면 안 되는가? 인물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되는가? 슬래셔 무비 같은 데서 등장하는 죽음은 장르에 의해, 장르를 위해 재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과 방법만 다를 뿐이지 정말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죽음에 내몰리는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한다. 2009년 용산구 한강로동 2가 남일당 건물에서 경찰특공대와 용역의 진압에 맞서 점거 농성을 벌이던 시민들이 화재로 인해 죽었다. 2009년부터 쌍용차에서 해고된 뒤 복직 투쟁을 벌이던 노동자들 중 지금까지 스물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작년에는 수학여행을 떠나던 고등학생을 비롯한 승객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해 삼백 명에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면서 단지 영화가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의 윤리성에 대해 논해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단지 영화가 죽는 장면을 찍을 때 트래블링을 써서는 안 된다는 데 머무른다면, 우리는 영화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해야 할 것이다. 세계에 만연해 있는 엉뚱한 죽음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서 영화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 어떻게 해야 영화를 윤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내게는 정답이 없다. 어쩌면 그 답을 끝까지 찾지 못한 채 현실에 패배만을 거듭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질문하고 답을 찾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럴 때에만 영화가 죽지 않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영화야말로 인간 삶의 영원한 존재 양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재현해야만 하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유보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그저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가 영화인 것은, 영화가 단지 영화일 뿐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의 미래는 별로 밝지 않아 보이지만 같은 말을 영화에는 찬란한 과거가 있다고 다시 쓸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과거가 찬란했느냐 아니냐는 이제 와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현대 영화’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들이 정말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음에 가까운 자리로 내몰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영화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부도덕한 영화’들을 당장 또는 점진적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말할 생각이 없다. 더군다나 세상은 이미 충분히 부도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도덕한 영화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우리는 부도덕한 영화들이 정말 부도덕한 것인지 끊임없이 검토하고 이들 영화를 어떻게 영화의 품 안에서 생각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답을 찾아나가는 일을 포기하지는 않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