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라

〈비판 리뷰 1〉 네 번째: 클로즈업

흔히 카메라와 사람의 눈을 비교한다. 사람이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이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기계-눈kino-eye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비유에서 나온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원근법을 발명해냈다. 원근법은 고정된 좌표에 서 있는 화가가 움직이지 않은 채 한쪽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법이다. 그것이 발명된 이래, 현대 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원근법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를 지배하는 원리이자 원칙이었으며 세계를 재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화가들의 구체적인 실행을 통해서만 이미지로 만들어지던, 다시 말해 방법론으로만 존재하던 원근법의 주체인 ‘한쪽 눈’이 드디어 사람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와 전기로 작동하는 물리적인 존재 양식을 획득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카메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관객을 대신해 세상을 본다. 눈의 연장물extension, 기계-눈으로서의 카메라. 그런데 카메라에는 사람의 눈은 가지고 있지 않은 기능이 있다. 줌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과 달리 카메라는 선 자리에서 줌-인 해 멀리 있는 대상을 더 크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기계-눈은 움직이지 않고도 대상에 다가갈 수 있다. 줌이라는 이름의 축복은 카메라에 고정된 이동성이라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부여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필연적으로 마냥 자연스럽지는 않다. 사람의 눈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당연하다(오늘날의 관객은 줌-인과 줌-아웃을 자연스럽게 여기지만 그 관객이란 영화가 충실히 교육한 관객이다). 당신이 한쪽에 인공 눈을 달았거나 특수한 장비를 장착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사람의 눈으로 멀리 있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확대했다가 축소했다가 하면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사에 완전히 끌려들어가 몰입한 채 어떤 영화를 보다가 줌-인이나 줌-아웃이 사용되는 순간 우리는 이것이 카메라의 시선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괜스레 상기하는데 사실 이것은 거의 강요에 가까운 일이다. 가령 홍상수의 영화를 보다가 느닷없이 카메라가 줌-인 해서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라.

줌은 고정된 위치에서 다양한 샷 크기—클로즈업, 미디움샷, 풀샷, 롱샷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의 화면을 생산하는 데에 힘을 보탠다. 하지만 사실 줌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위치를 옮겨가면서 피사체와의 거리를 조절해 다양한 샷 크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고, 실제로도 이 방법을 더 많이 쓴다. 굳이 카메라가 선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도 줌을 사용해 샷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데 그것을 부러 사용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상한 관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에 관련된 기술적인 주제들은 일단 여기서는 넘어가려고 한다. 아무튼 샷 크기는 그래서 기본적으로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를 가리킨다. 일상적인 범위에서 사람의 시각과 가장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클로즈업이다. 영화 문법은 ‘적대’라든가 ‘주목’ 같은 시각에 결부된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샷 크기를 이용해왔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할 때 우리의 시야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반면, 클로즈업은 주목 또는 집중이 이루어지는 대상(세계)의 특정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를 프레임 바깥으로 밀어내버리는 방법이다.

카메라가 사람들을 클로즈업 하면 그의 어떤 신체부위가 크게 확대된다. 스크린이 누군가의 신체 부위로 가득 차는 것이다. 이때 ‘그’는 영화 서사에 포함된 어떤 캐릭터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신체에서 여러 가지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누구이든 그의 신체는 프레임에 의해 분절되고, 한 번 분절된 신체는 별로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는 듯 하다. 당신은 커다랗게 확대된 누군가의 떨리는 손을 보고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지금 긴장한 상태라는 사실은 그의 거대한 눈동자가 이견의 여지 없이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보고 있는 그 영화가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전체 모습을 본다고 해서 당신은 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는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대된 신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지 눈에 보이는 비주얼 이미지 이외에 어떤 이면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제공하는가? 그것이 어떤 샷이든 그 이미지에 비주얼만이 남아 있다면 비평가가 그것을 들여다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비평가가 클로즈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꾸어 말하면, 클로즈업에는 비평가가 주목할 만한 어떤 것이 있는가? 비평가는 클로즈업을 왜 클로즈업 해서 들여다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클로즈업을 볼 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 프레임 안에 들어온 것이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안다. 어떤 익스트림 롱샷도 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익스트림 롱샷으로 찍힌 장면을 볼 때 그것이 꽤 넓은 세계, 적어도 한 시스템의 전반적인 모양새 정도는 밝혀준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착각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롱샷은 가장 편협한 시선이다. 그에 반해 클로즈업은 스스로 좁은 시야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프레임 바깥을 강력하게 지시한다. 클로즈업은 그 대상이 되는 피사체의 일부분을 강조하는데, 함께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의 일부분이라는 개념 그 자체다. 그러므로 클로즈업은 일부분만을 보여주면서도 다시 총체성을 가리키는 어떤 것이다. 클로즈업은 달을 가리키지는 않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클로즈업만으로 구성된 영화는 일반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일부분과 총체의 상호작용이 일반론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전체를 불러낸다. 그런 점에서 클로즈업은 어쩔 수 없이 총체적이지 못한 시각을 가장 담담하게 인정하는 샷 크기다. 따지고 보면 그 누구도 어디서도 시각적으로 세계 전체를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총체적인 세계의 비주얼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는 한없이 힘들고 어쩌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별개로, 정말로 확대된 신체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클로즈업도 있다. 스포츠 중계에서는 관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줌과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논의할 것이다.

같은 클로즈업이라도 그것이 카메라가 피사체에 그만큼 가까이 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멀리서 줌인으로 확대한 영상이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크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클로즈업을 카메라의 상태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참이다. 카메라가 그만큼 피사체에 가까이 다가가서 촬영함으로써 만들어지는 클로즈업(1), 카메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지만 줌-인 해서 만들어지는 클로즈업(2), 그리고 카메라 없이 만들어지는 클로즈업(3)이다. 첫 번째 경우는 사람이 어떤 것에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을 보는 것과 동일하다. 두 번째 경우는 눈의 연장으로서의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만의 무엇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카메라야말로 영화의 가장 주요한 창작 도구가 아니냐고 주장한다면, 필연적으로 그는 카메라의 기술적 가능성을 가능한 활용하려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늘날의 영화 중 상당수에 실망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논의를 다소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오히려 그는 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뮤직 뱅크>나 해외 축구 생중계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어쩌면 카메라를 그 권좌에서 끌어내린다면, 즉, 카메라를 영화 제작의 필수요소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변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세 번째 경우가 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몇몇 영화들은 카메라 없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카메라 없는 영화는 오히려 카메라로 만든 영화보다도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샤를 에밀 레이노는 이미 뤼미에르 형제보다 앞서서 애니메이션 기법을 통해 ‘움직이는 그림 motion picture’을 만들어냈다. 거기서부터 시작한 애니메이션의 전통은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에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하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은 그 구성의 원리에 있어서 상당 부분 카메라로 만드는 영화의 그것을 따라가고 있다. 오히려 일본 2D 계열의 애니메이션은 그런 흐름이 덜한 편인데 요즘 많이 만들어지는 3D 애니메이션 영화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샷 구성은 실사 영화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좋다. 더군다나 실사 영화들이 CG로 많은 장면들을 처리하면서 3D 애니메이션과의 구분이 어느 정도 흐릿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카메라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도 아닌데 굳이 카메라의 존재를 전제로 구성된 규칙에 따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왜일까?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실제 같아 보임’ 즉, 세계와의 유사성에 있는가?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관성이다. 영화를 과거에 머물러 있게 하려는, 동시에 관객을 과거에 붙잡아 놓는 시대적 관성. 카메라에 대한 집착은 영화의 권위를 지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르나 그것은 동시에 영화가 빠져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영화(를 비롯한 영상 문화)가 카메라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가는 지금부터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전에 영화와 영화 아닌 것을 동등하게 비교하기 위해 간단한 틀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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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를 개별적인 샷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세 개의 샷 a, b, c로 이루어진 영화 A가 있다면 이것을 “A={a, b, c}”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샷을 이어 붙여 만드는 것은 영화 뿐만이 아니다. TV 프로그램, 스포츠 중계, 유튜브에 올라온 홈 비디오 클립도 다수의 샷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또한 영화와 마찬가지로 샷의 집합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만들어져 온,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모든 영화(집합)와 TV 프로그램(집합) 등등 영상 일반의 일반적이고 총체적인 전체집합을 가정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전체집합 C는 앞서 말한 영화 A 즉, 집합 {a, b, c}를 비롯해 수많은 샷들을 원소로 갖는다.

그런데 집합론에서 집합 안에 들어 있는 원소의 순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a, b, c}, {b, c, a}, {c, b, a}, {c, a, b}, {b, a, c}는 다 같은 집합이다(수학적인 의미에서 이들을 구별지을 수 없다). 개별 샷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하느냐가 영화 편집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처럼 영화를 단순히 샷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려면 어느 정도 위험을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전에 자신이 본 영화를 생각할 때 그 영화의 첫 번째 샷부터 마지막 샷까지를 순차적으로 떠올리거나 또는 마지막 샷부터 반대 순서대로(즉, 현재 시점에서 가까운 것부터 차례로) 떠올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군의 영화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도 그것들을 가장 과거에 본 것부터 생각하거나 가장 최근에 본 것부터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기억되고 호출되는 과정에 대해—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아카이빙의 측면에서—얘기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영화에 대해서나 여러 영화들에 대해서나) 영화(들)이 만들어질 때는 시간적 순서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일단 우리가 그것을 한 번 본 후에 그것을 기억할 때에는 훨씬 더 시간에 대해 평등해진다. 그러니까 예컨대 <미스터 노바디>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니모와 안나가 헤어지는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시간에 대해 평등한 샷들의 집합이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생각하는 것도 결코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며, 어쩌면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영화의 전체집합으로 다시 돌아오자. 우리가 이 영화들의 전체집합을 생각할 때 그것의 원소는 모두 평등하다. 우리는 그것들의 순서를 자유롭게 배치할 수도 있고 샷, 씬, 시퀀스, 영화의 위계를 구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아까 들었던 예시에서 {a, b, c}라는 영화와 a라는 샷은 이 전체집합 안에서는 둘 다 하나의 원소로 생각되며 같은 위계에 있다(위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샷과 다른 샷, 어떤 샷과 어떤 영화, 어떤 영화와 다른 영화를 평등하게 놓고 비교해 볼 수 있다. 영화 A에 속하는 샷과 영화 B에 속하는 샷을 동등하게 비교할 수도 있다. 한편 우리가 이 전체집합에 포함시킨 것 중에는 영화뿐만 아니라 통상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자. 이 전체집합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화와 영화가 아닌 것을 동등한 위치에 놓고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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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을 통한 클로즈업이야말로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줌-인을 사용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 영화들은 줌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보다도 오히려 영화적인 것은 스포츠 중계나 <뮤직뱅크> 따위의 방송 프로그램이다.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프로 축구 리그는 영국의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English Premier League다. 프리미어리그는 한 시즌 중계권료만으로 51억 3600만 파운드의 수입을 올린다. 51억 3600만 파운드라는 수치는 한국 돈으로 바꾸면 8조 5000억 원쯤 된다.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계에는 보통 24대의 방송용 카메라가 동원된다. 프리미어리그 중계에 사용되는 카메라들은 K리그 중계와 비교했을 때 훨씬 더 경기장에 가까이 배치되어 광각으로 촬영하기 때문에 보다 경기가 빨라 보인다. 그러니까 해외 축구에 비해 한국의 프로축구가 속도감이 떨어지고 따분하게 ‘보이는’ 것이다. 단지 실력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몇 대의 카메라가 어떤 각도에서 경기를 지켜보는가가 방송 중계의 박진감에는 더욱 큰 영향을 끼친다. 한국의 프로축구 중계도 중계 환경이 개선된다면 인기가 더 상승하고 직접 경기장을 찾아오는 팬의 수도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K리그 열성팬들의 중론이다. 뛰어난 기술적 기반 위에 서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앞선 중계는 리그의 상업적 성공과 맞물려 지난 몇 년간 재정적인 선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프로 축구 리그는 국가별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우주에 위성을 띄워 놓고 그것을 이용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축구 경기를 생중계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적어도 유럽의 몇몇 리그의 팬덤에 있어 국경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나라에 살지 않더라도 팬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는 데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 팀들은 전세계적인 규모의 팬덤을 확보하고 있고, 이 팀들은 어떤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때 그 선수의 출신 국가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상업적인 가치를 심각하게 고려한다. 또 시즌이 끝나고 나면 아시아와 미국 등지에서 투어를 벌이며 추가적인 수입을 올린다. 이제 축구 사업은 전세계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고,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중계 기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축구 중계는 각 리그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그리고 그를 통해 상업적 가치를 최대화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점차 축구 중계는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 낸 카메라의 기술적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해 멋지고 동시에 쉽게 이해 가능한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영상문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영화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모종의 문법 같은 것도 생겨났다. 여러 대의 중계 카메라가 경기장 군데군데에 배치되어 있고 화면은 때에 따라 적절한 위치에 있는 카메라에서 잡은 영상을 돌려가며 보여준다. 가령 골(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질 때에는 관중석에서 경기장 중앙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배치되어 있는 기본 카메라가 (시청자가 따로 의식하지 않으면 별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줌-인해 들어간다. 이것은 골이나 적어도 하이라이트에 들어갈 만한 위험지역(페널티 박스 안)에서 벌어지는 인상적인 장면을 더욱 긴장감 있어 보이게 한다. 골이 들어가면 골대 근처에 낮게 배치된 카메라가 골이 들어가는 장면을 가장 가까이서 보여준다. 만약 골대와 일직선상에서 보았을 때 좋은 장면이라고 판단될 때는 반대편 골대 뒤 관중석 위에 배치된 카메라가 극단적으로 줌-인해서 그라운드 저편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선수들 뒤에서 보여준다.

거의 영화나 드라마에 가까운 샷-리버스 샷 구성이 스포츠 중계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편집이 쓰이는 것은 보통 경기장 밖에서 일어난 상황의 서사를 경기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역할을 한다. 가령, 어떤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가 새로 이적해 팀에 들어왔는데 연이는 경기에서 극도로 부진한 경기력을 보여준다면 언론에서는 이 선수가 왜 부진한지(훈련 태도나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거나) 분석하거나 팬들의 반응을 인용하며 그 선수를 비판하거나 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등 그것을 이슈화시킨다. 다음 경기에서는 당연히 카메라들이 그 선수를 집중 조명할 것이다.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거나 세트피스를 준비하는 상황에서 몇 초간 경기가 지연될 때, 특히 바로 직전 장면에 그 선수가 공을 잡고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거나 했을 때 경기장 주변에 위치한 카메라들은 클로즈업으로 이 선수의 표정을 보여줄 것이다. 다른 예로, 지난 경기에서 심한 충돌을 일으켜 문제가 되었거나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한 어떤 선수와 다른 선수가 경기에서 만나게 되면, 카메라들은 이 두 선수를 열심히 잡으며 방송은 이것을 샷-리버스 샷으로 편집한다. 지역 라이벌 팀이 만나는 더비 경기에서는 틈이 날 때마다 관중석을 비추는 카메라가 양 팀 팬들의 격렬한 응원을 보여주고 벤치에 앉아있는 양 팀 감독이 초조해하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샷-리버스 샷으로 보여준다.

기껏해야 단지 ‘영화 같은’ 편집에 머물렀던 TV 중계는 기술의 발전으로 점차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CG를 이용해 화면에서 선수의 위치와 이름을 실시간으로 표시하고, 초고속 카메라는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인간이 눈으로는 관찰할 수 없는 정도로 천천히 보여준다. 경기장 이쪽에 있는 카메라의 시점에서 저편의 다른 카메라의 시점으로 끊이지 않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화면도 만들어낸다(시작할 때의 시선과 도착 지점의 시점만이 실제 카메라에서 얻어진 영상이고 그 사이의 프레임은 모두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영상이다). 지난 월드컵에서는 극단적인 클로즈업 기능을 가진 ‘호크 아이’라는 이름의 골 판독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공이 선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아닌지를 심판 대신 판단했고, 경기장 위를 날아다니는 카메라가 마치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 안에서 찍은 듯한 영상을 전세계로 송출했다. 점점 기술이 중계의 방식을 뒤바꾸어 놓고 있으며, 나아가 기술 그 자체가 중계의 핵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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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중계를 구태여 논하지 않더라도 영상 문화 전반에 걸쳐 카메라에 대해 횡횡한 물신 숭배가 존재하고—〈버드맨〉을 보라—클로즈업은 하나의 증상이다. 클로즈업은 적대적이다. 그것은 신성하고, 동시에 분절적이다. 증폭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시각적인 트랜지스터 내지는 확성기다. 확대 영사는 뤼미에르적 영화가 가진 본연의 기능 중 하나이고 클로즈업이야말로 영화가 거기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영화에서 사람은 가장 중요한 피사체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어떤 것의 클로즈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본질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인간의 방식으로 비추어진다. 해당 클로즈업 샷만을 보았을 때 마치 그것이 이 샷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결국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주체의 타자라는 점이 밝혀진다. 가령, 동물 다큐멘터리에는 동물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등장하고 여기서 클로즈업은 동물에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이 카메라 뒤에는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는 카메라맨—인간—이 있고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을 이해하기 위해 시청자와 함께 그 장면을 보는 내레이터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그 클로즈업 샷을 바라보면 그것은 주체 없는 타자에 가깝다(어떤 점에서는 이 타자가 다시 주체를 재규정하기도 하는 것 같다). 즉, 일견 인간과 무관하거나 심지어는 인간이 소외된(또는 그렇게 하려는) 클로즈업 샷이라 하더라도 결국 그 클로즈업의 주체는 그 생산 과정에 있어서나 수용의 과정에 있어서나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우리는 클로즈업에서 화면 바깥을 생각해야(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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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은 일차적으로 무언가를 크고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고안되었다. 클로즈업은 손가락을 보여주지만 손가락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영화는 손가락을 클로즈업하되 관객이 그것을 보고 달을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클로즈업된 손가락을 보고 달을 생각해야 한다. 클로즈업이 유의미해지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라.

클로즈업은 대상을 크게 확대해 그 이미지를 관객들 앞에 내어놓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프레임 바깥을 어떤 샷보다도 강하게 지시한다. 클로즈업의 가치는 확대된 이미지가 아니라 이 프레임 바깥으로의 지시에 있다. 확대된 이미지 그 자체는 카메라에 대한 물신적 집착을 부추길 뿐이다. 영화가 카메라를 물신화할 때 오히려 영화보다 영화적인 것은 스포츠 중계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영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카메라의 권좌를 빼앗아야 한다. 영화를 지키기 위해서 과대평가된 뤼미에르의 확대영사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더군다나 스마트폰 등을 통해 확실히 영화가 이동성을 획득했고 그 이동성이 상업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상황에서 ‘커다란 클로즈업 이미지’가 더 이상 어떤 의미를 띨 수 있을까(띠어야 할까)? 영화의 이동성이 사실 부정적인 것이라면 CGV 울산 삼산점 아이맥스관야말로 영화가 귀환해야 할 진정한 낙하 지점인가? 한편으로 우리는 애니메이션—카메라 없는 영화—에 영화의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검토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식의 검토를 거칠 때에야 비로소 영화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틈바구니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