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순환행 지하철을 탔다
밤을 새며 밀린 과제를 했다. 보다 정확히는 밀린 과제에 괴로워하며 챔피언스리그 중계를 보고 노래를 하나 만들었으며 다가올 오늘의 일정에 두려워했다. 나의 오늘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오전 열 시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생회장 서희강 씨를 인터뷰하고 오후 두 시에는 석관동에 돌아와 한국 근현대 미술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전학대회를 취재할 예정이다. 자정까지는 지지난 주부터 문자 그대로 밀려온 과제와 수업에도 안 나간 지난 주에 나온 새 과제를 마감할 것이다(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나는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돌곶이역 응암순환행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을 걸더니 자신이 블랙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버튼을 잘못 눌러 밀크커피가 나왔다며 금방 나온 자판기 커피를 건넸다. 누군지 모르는 인간이 베푸는 호의는 믿지 말라고 초등학교 다닐 때 배웠지만 설사 저자가 이 커피에 설사약 같은 걸 탔더라도 갑자기 설사를 존나 해서 괴롭긴 해도 동행의 도움으로 최소한 응급실 비슷한 데 가서 합법적으로 책임을 방기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디 청산가리 같은 걸 탄 것 같은 비장한 느낌은 아니었기 때문에(영화 같은 거 보면 청산가리 탄 커피를 건네줄 때는 항상 긴장되는 배경음악을 깔고 클로즈업으로 커피를 크게 비추는데 그런 게 없었다. 커피는 존나 풀샷으로만 보였다. 물론 농담이다) 잘 받아 마셨다. 그 밀크커피는 실은 블랙커피였다. 그사이 그 사람은 새 커피를 뽑더니(블랙커피인 듯 했다) 어디 무슨 시발 교회 비슷한 곳 브로슈어를 나와 동행의 무릎 위에 하나씩 얹고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믿고 복 받으라는 둥 교회 꼭 한 번 나오라는 둥 소리를 하고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래 그 커피는 블랙커피가 아니었다. 그 커피는 예수의 피였던 것이다. 나는 금방 자판기에서 백 원짜리 동전 몇 개와 맞바꾼 예수의 검은 피를 마시며 내 영혼이 성령과 합일되는 성스러운 순간을 느꼈고 심지어는 결국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께서 내가 어디에 있든간에 내 곁에 함께 하시며 나를 굽어보고 있다는 것까지 직감했다. 속이 좀 쓰렸지만 아직까지 설사는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커피는 블랙커피였다. (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