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다는 안락사이다

"반복되는 고민과 어려움에 지치셨다구요? 이제는 인생의 쳇바퀴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구요? 지금 바로 ‹안락사이다›로 빠르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고통 없이 저세상으로 보내드립니다."

언젠간 이런 게 생길 것이다. 생명 경시라며 비난 받을지도 모르겠다만 글쎄, 지금의 한국 사회만큼 탁월하게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가 또 있는지 먼저 질문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매년 맹렬히 자살을 감행하며, 압도적인 자살율을 내보이는 통계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치 그들에게 죽음 이외의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열려있었어야 할 다른 문들이 왜 닫혔거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는지 먼저 질문해야 한다.

요컨대 한국에서 공공성은 절멸하고 자본이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 결코 가망 없는 희망의 미끌거리는 가장자리를 붙잡은 채 비정규직 노예 내지는 소모품으로서 불우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중지하는 편이 보통의 존재들에겐 그나마 가장 능동적이고 인간다운 선택이라 여긴다. 세상에 부재할 권리, 자신의 존재 유무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 즉, 안락사를 선택할 권리를 달라. 나는 지금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만이 개개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사회에서라면 마땅히 주어져야 할 선택의 권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다른 것을 다 잃더라도, 누군가가 원한다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자유만큼은 되도록 그 자신에게 있었으면 한다.

그래 죽음은 무거운 주제가 맞다. 그러나 죽느니만 못한 삶은 과연 죽음보다 가벼운가? 그러므로 나는 삶에 대한 달뜬 희망을 노래해야 하는가? 인간 역사의 점진적 진보는 신화에 불과하며, 개별성은 파기된 지 오래다. 이미 우리는 천천히 끓는 물 안의 개구리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구별할 수 없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고 들으며 거기서 거기인 생각을 하고, 편협한 어휘를 쓰며, 맛없는 우유를 마시고, 예측 가능한 행동을 일삼는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하는데 각개전투를 펼친다. 나를 포함한 지금의 청년들에게 연대는 과거의 유물이요 지난한 꿈이다. 이미 물은 끓기 시작했고, 우리에게는 남은 선택지가 별로 없다.

그러니까 막연히 죽음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피할 수도 없는 것을. 지금 나는 살아있음의 의미를 찾아 필사적으로 세상을 헤매고 있으며, 실은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섣부른 극단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죽을 수 없어서 살아 있는 언데드로 존재하지는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