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선배와 실험영화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교환학생으로 곧 독일로 떠나게 되었었는데, 교환학생은 어떻게 신청하는지, 거기 가서는 무슨 공부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다보니 어느새 실험영화가 이야기의 화제가 되었다. 그의 전공이 바로 실험영화였던 것이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능 공부하기가 너무 싫어서 현실 도피 삼아 이 학교에 원서를 냈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합격이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실험영화에 대해서는 물론 일반적인 영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그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었다. 그가 그런 설명을 하며 노트북으로 보여준 한 편의 영화가 피터 체르카스키Peter Tscherkassky의 <외부 공간 Outer Space>이었다. 이 10분 짜리 엄청난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 선배가 뭐라고 설명을 하길래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알아듣는 척을 했다. 세상은 넓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 본 <외부 공간>의 이미지, 사운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이따금씩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생명력 있는 느낌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지적 호기심으로 변했고, 실험영화사를 듣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험영화사 강의는 흥미로웠지만 그만큼 어려웠다. 수업은 대체로 알 수 없는 어떤 작품을 보며 혼돈으로 빠져들어가다가 부연 설명을 들으며 그제서야 뭔가 이해하는 듯한 착각을 하고, 곧 그 설명을 곱씹어보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변증법적 과정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생소한 작가와 그들의 작품들을 접했다. 그중에 홀리스 프램튼Hollis Frampton의 <초른의 보조정리 Zorn’s Lemma>와 커트 크렌Kurt Kren의 <15/67 TV>도 있다. 나는 여전한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품에 대한 나름의 접근을, 이들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그것이 관객의 마음에 어떠한 운동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시도해보고자 한다.
<초른의 보조정리>와 <15/67 TV>는 모두 강의에서 구조주의 영화를 다루며 언급한 영화들이다. 구조주의 영화를 다룰 수 있는 틀로서의 집합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었다. 이 부분이 전 강의를 통틀어 가장 재미났던 부분이었다.
구조주의 영화는 대체로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들로만 이루어져있다. <초른의 보조정리>, <15/67 TV>, 그리고 강의 첫 시간에 봤었던 피터 지달Peter Gidal의 <코다 1 Coda I>, <코다 2 Coda II> 또한 구조주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피터 지달의 <코다>와 같은 영화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모호한 이미지와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패턴이 규칙적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이것은 어떤 영화적인 힘을 띤다. 구체성을 가지지 못한, 낱개로 보면 의미없는 이미지이지만 특정한 배열에 의해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수업 시간에 했던 대로) 집합론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원소가 낱개로 존재할 때는 그것은 그저 어떤 원소, 이미지로서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관에서 관습적인 영화를 관습적으로 받아들일 때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원소(이미지)를 집합 기호 { } 안에 배치하는 순간 이 원소는 더 이상 단순한 원소가 아니게 된다. 집합으로 묶이는 순간 이미지는 이미지로서의 이미지라는 동어 반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합 기호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영화를 영화관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배치할 때—가령 영화가 갤러리에서 전시될 때, 수업의 일부로 교실에서 특정한 부분만을 상영할 때, 영화를 노트북 스크린으로 볼 때—생겨나는 어떤 것이다.
<초른의 보조정리>은 홀리스 프램튼의 숫자, 체계, 언어학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매우 규칙적으로, 또는 적어도 그런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빈 화면에서 한 목소리가 무언가를 계속 읽는데, 그것은 뉴잉글랜드가 아직 영국의 식민지이던 시절 만들어진 읽기 교본이다. 그것은 “초기 미국의 기본 원칙 ABC—도덕이자 언어의 첫걸음”인 것이다. 그 후 24개의 로마 알파벳(‘j’와 ‘u’는 제외된다)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바꿔가며 보여준다. 그 이미지들은 뉴욕의 거리의 간판들에서 얻은 것이다. 각각의 알파벳 숏은 1초 동안 지속되며, ‘a’부터 ‘z’까지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령, 하나의 순환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A, Baby, Cabinet, Daily, Each, Fabric, Gain, Hack, I, Kangaroo, Labor, Machine, Nab, Oak, Pack, Quake, Rack, Sabbath, Table, Vacancy, Wagon, (이미지), Yacht, Zenith, (암전)
역시 1초 동안 지속되는 암전은 하나의 순환이 끝나고 다음 순환이 시작된다는 것을 신호한다. 한편 어떤 샷들은 글자가 포함되지 않은, 다른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더 정확히는, 특정한 문자가 이미지로 대체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대체되는 글자는 ‘x’다. 그것은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몇 번의 순환이 지난 뒤 이번에는 ‘z’가 해변에서 (바다쪽으로) 밀려나가는 파도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어떤 문자가 한 번 다른 이미지로 대체되고 나면 다음부터 그 자리에는 같은 이미지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x’나 ‘z’로 시작하는 단어는 그 수가 많지 않다. 알파벳들은 그것들이 첫 글자가 되는 빈도가 적은 순서대로 이미지로 대체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 가설이 유효하다면, 이것은 언어가 소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모두 소진되고 나면 그것은 이미지로 대체된다. 소진되어가는 것은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특정한 이미지들은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이 반복되면서 점점 더 완성되어간다. 타이어 교체, 점점 쌓여서 화면을 채워가는 콩, 신발끈 묶기 등. 이 이미지들은 문자와 함께 시간 또한 점점 소진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타이어를 다 교체하고 나면 영화가 끝날 것이다. 콩이 화면을 다 채우면 영화가 끝날 것이다.
알파벳이 소거되어 가는 순서나, 영화가 언제 끝날 것이다 하는 추측은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어서, 관람자는 이 다음에는 어떤 알파벳이 소거될지, 영화가 언제 막을 내릴지를 은연중에 예상하며 영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예상이 종종 맞기도 하지만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영화는 엄밀한 규칙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그것을 밝혀내려고 하면 또한 어느 정도 무질서하게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장치—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이다.
한편, 집합론을 이용해 이 영화를 분석해보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새로운 틀을 제공한다. <초른의 보조정리>를 각각의 알파벳 샷을 원소로 가지는 하나의 커다란 집합으로 보고, 그 집합을 <초른의 보조정리> 집합이라고 부르자. 그러면 앞서 기술한 하나의 순환의 예시를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A, Baby, Cabinet, Daily, Each, Fabric, Gain, Hack, I, Kangaroo, Labor, Machine, Nab, Oak, Pack, Quake, Rack, Sabbath, Table, Vacancy, Wagon, (이미지), Yacht, Zenith, (암전)}
(사실 집합에서는 원소들의 순서가 바뀌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까지 엄밀히 따질 만한 수학적 소양이 부족해 여기서는 순서가 부여된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이러한 순환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순환은 대체로 ‘a’부터 ‘z’까지 각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순환에 대한 간편한 조건제시법의 기술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른의 보조정리> 집합은 특정한 알파벳 X로 시작하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즉,
<초른의 보조정리> 집합 = {특정한 알파벳 X로 시작하는 단어 | X = ‘a’, ‘b’, ‘c’, … ‘z’}
그러나 이 수식은 <초른의 보조정리>를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 기술된 집합은 무한집합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초른의 보조정리> 집합은 어디까지나 유한집합이다. 이 영화는 60분이라는 한정된 러닝타임을 갖고 있고 그 안에서 한정적인 개수의 샷들로 구성된다. 더군다나 원소가 되는 알파벳 샷들은 뉴욕의 간판들에서 가져온 것이다. 단어가 그들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배치되어 있어 추상적인 느낌을 준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유한한 대상인 것이다. 뉴욕은 상업과 금융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도시다. 도시의 전경을 차지하는 수많은 간판들은 마치 자본의 무한성을 지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기실 그들은 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른의 보조정리> 집합을 온전히 기술하기 위해서는, 영화에 등장한 단어와 이미지들을 원소나열법으로 하나하나 기술하는 수 밖에는 없어 보인다. 영화를 구성하는 클로즈업된 글자들은 어느 정도 일반적인 느낌을 주고, 그들 사이에도 어느 정도 규칙성이 존재하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몇 가지의 규칙이나 조건으로 일반화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하면 영화는 자신이 가장 구체적인 존재임을 스스로 부각하게 된다.
규칙성에 있어서는 커트 크렌의 <15/67 TV>도 <초른의 보조정리>와 매우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다섯 개의 샷이 하나의 순환을 이루고, 그들의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다섯 개의 샷이 하나씩 보여진다. 편의를 위해 각각의 샷을 a, b, c, d, e라고 이름붙이자. 영화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abcde aacde aaade aaada
bbdea bbbea bbbeb bbdbb bcbbb
cceab cccab cccac
ddeac dddce dddcd ddadd deeee
eecac eeeac eeacc edcba
이것을 보면 각각의 순환이 불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샷으로 시작하는 순환들은 서로 인접해있다. 처음의 순환과 마지막 순환은 샷들의 순서가 정확히 반대다. 또한 (위에서 행으로 나누어 놓은) 각 샷으로 시작하는 순환들의 개수는 4-5-3-5-4로 대칭을 이룬다. 중간을 이루는 순환들도 일정한 규칙을 띠는 것 같다. (aacde, aaade, aaada를 한 샷씩 순서를 밀면 bbdea, bbbea, bbbeb가 되고 한 번 더 밀면 cceab, cccab, cccac가 된다.) 이쯤 되면 관객은 이 영화가 모종의 수학적인 규칙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고 믿게 된다. 나아가 (실험영화를 이제 막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이라면) 구조영화란 바로 이렇게 규칙적인 배열로 이루어진 영화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15/67 TV>는 <초른의 보조정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이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규칙은 이 영화의 구성요소의 몇몇 부분에 각각 해당하지만 거기서 그칠 뿐,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규칙은 없다. ‘이 영화는 이런 규칙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편리하게 요약할 수 있는 일반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미 그 규칙은 너무나도 비가시적이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15/67 TV>가 <초른의 보조정리>와 달라지는 지점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규칙성’—결국 아무것도 규칙적으로 정리되는 바는 없지만, 적어도 작은 단위에서는 유효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렇게 기술한다—을 드러내는 정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초른의 보조정리>는 60분의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규칙성’을 발견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누구나 각 알파벳 샷들의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그것이 점점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대치되어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15/67 TV>의 러닝타임은 4분이 조금 넘는다. 즉, <15/67 TV>의 ‘규칙성’은 <초른의 보조정리>보다 훨씬 더 발견하기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 <15/67 TV>를 사전 지식 없이 처음으로 보고나서 곧바로 이 영화는 5개의 샷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샷으로 시작하는 순환들이 그룹을 이루고 있고, 처음의 순환과 마지막의 순환은 그 순서가 반대라는 것 등등을 간파해낼 수 있는 관객은 별로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 영화를 이루는 샷이 5개라는 것을 네 번쯤 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규칙성이 존재할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이미 영화가 끝난 후에 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커트 크렌은 관객이 그의 영화를 처음 보면서 어떤 ‘규칙성’을 곧바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15/67 TV>를 보고 처음 얻게 되는 인상은, ‘여기엔 뭔가 규칙성이 존재할 것 같다’라는 것,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관객은 영화를 재차 감상하게 되고, 어떤 규칙성을 발견하려고 하고 실제로 모종의 규칙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 그는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는 규칙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 이 영화는 그저 무질서한 샷들의 연속일 뿐이며, 그들이 무질서한 구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자면 거의 어떤 의미도 나타내지 않는, 무의미해보이는 샷들의 연속이 보는 이의 마음 속에 이러한 운동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퍽 놀라운 일이다. <초른의 보조정리>와 <15/67 TV> 모두 이 운동을 생성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프레임 바깥에서, 즉 영화와 관객의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이것을 구조영화의 디스포지티프dispositif의 또는 사회적 미장센social mise-en-scène의 작용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즉 이 영화들은 프레임 안의 분석만큼이나 프레임 바깥의 분석, 프레임 안과 바깥의 관계의 분석을 필요로 하는 영화인 것이다. 내가 처음 구조영화, 나아가 실험영화를 접하고 큰 당혹감을 느꼈던 것은 이전까지 단지 프레임 안의 분석만을, 전통적인 미장센 분석만을 해왔기 때문이다. 미장센 분석으로는 프레임 안과 바깥을 오가며 일어나는 운동들을 제대로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홀리스 프램튼과 커트 크렌의 두 영화는 미장센 분석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 하겠다. (2014. 6. 19.)
참고: Zorn's Lemma: A Film by Hollis Framp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