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엄마>: 진부하지만 괜찮아?

<비판 리뷰 1> 여섯 번째: <안녕, 엄마>(김효미) 리뷰

강의실에서 밤을 새면서 <안녕, 엄마>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다른 영화들 사이에서 등장한 이 짧은 애니메이션 영화가 무척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잡한 만듦새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다. 너무나 전형적이지만 그래서 더 예상치 못했던 주제와 형식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영화들은 잠시 잊어버렸다.

이미지와 지각의 복잡한 상호작용 끝에 내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어찌 됐건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감동이라는 것에 대해서 영화를 본 지 얼마 뒤부터는 (언제나 그렇듯이)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녕, 엄마>는 스테레오타입,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의 영화다. 시골에 사는 늙은 엄마가 서울에 있는 아들의 방문을 기다리다 못해 직접 찾아가지만 실은 이미 집에서 쓰러져 죽은 사람이 된 뒤였다는 서사, 거기에 어울리는 캐릭터 디자인과 예상 가능한 목소리 연출까지 어느 것 하나 전형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엄마가 이미 죽은 뒤라는 반전은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이 오기 전에 이미 들통나거나, 관객을 놀라게 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진부하다.

<안녕, 엄마>의 디제시스를 구성하는 요소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둘로 나눌 수 있다. 공간은 시골과 서울, 시간은 과거와 현재, 인물은 노인(엄마)과 젊은이(아들)로 나뉜다. 한쪽에는 시골-과거-엄마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고, 고개를 넘고 시간을 건너 그 반대편에는 서울-현재-아들로 이루어진 다른 세계가 있다. 각각의 세계는 나름대로 안정된 곳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시골의 계절은 바뀌지만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건은 인물들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할 때 일어난다. 이 영화의 서사는 전적으로 이 세계의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분법의 두 항은 반드시 서로 대립함으로써 전형성 또는 진부함에 기여한다. 먼저 언급한 엄마의 세계는 계절이 바뀌고 목가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이다. 반면, 아들이 있는, 계절이 바뀌지 않는 세계에는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아들에게 죽음은 업무 시간에 맞서 싸워야 하는 과제일 뿐이다. 도시에는 밤이 오지 않는다(영화에서 도시의 밤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도시 세계에서 엄마가 있는 시골은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깝지만 바쁜 시간을 쪼개 내려가기에는 충분히 멀다. 이 공간은 더 폭이 좁고, 다른 시간과 장소를 생각할 여유를 별로 주지 않는 곳이다.

실질적으로 영화의 유일한 남성인 아들은 젊고 매력적이다(얼마나 매력적이냐면 “이번 프로젝트만 잘 끝나면 [어머니 뵈러] 함께 다녀오자”는 실로 촌스러운 프로포즈에도 그의 동료-연인은 호호 웃으며 기뻐한다). 진부하긴 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모종의 라이벌 의식까지 느끼는 듯하다. 의사인 아들이 정작 자기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죽게 내버려둔다는 사실은 극의 핵심적인 아이러니다. 바로 여기서 내가 느낀 슬픈 감정이 나왔을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충분히 볼 수 있었을텐데. 엄마의 병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마지막 배웅은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들의 당연한 부채의식 또는 죄책감.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웃고 있는 영정 속 엄마의 사진으로 급히 그것을 무마하려 하지만 괴로움은 전혀 줄지 않았을 것이다.

첫 번째 씬에서 엄마는 암을 진단받는다. 과거에 속한 인물이 현재와 맞닥뜨렸을 때 반드시 일어나는 사건. 우리는 누구든 결코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이라고 부른다. <안녕, 엄마>는 죽음을 시간과 밀접한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실상 엄마는 암에 걸렸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이 영화에 악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엄마가 하필 그때 죽은 것은 단지 아들이 화전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한 것 이상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점에서 <안녕, 엄마>가 시간을 재현하는 방식은 주목해 볼 만하다. 우선 선형적인 시간이 있다. 사진을 통한 세피아톤 플래시백 장면 속의 과거와 컬러로 표현되는 현재가 있다. 또한 시골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통해 이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의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과거와 현재는 (중간에 길다란 공백이 존재하겠지만) 하나의 길다란 타임라인 위에 배열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한편, 같은 순간에 존재하는 과거와 현재가 있다. 나는 이 시간들 뒤에 ‘감각’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싶은데, 여기서 말하는 시간이 앞서 말한 연대기적이고 절대적인 관념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개인들이 각자 느끼며 안고 살아가는 주관적인 범주의 것이기 때문이다(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시간-감각들은 인물과 공간 등으로 표현된다. 달리 말하면, 엄마와 아들을 각각 경유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감각을 재현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이것들은 선형적인 것이 아니며, 한 시점에 함께 존재하는, 그리고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다층적인 시간이다.

과거-감각에 소속된 엄마는 현재로 가지 못한다. 어른이 된 아들이 의사의 길을 가며 서울에서 바쁘게 지내는 동안 엄마는 여전히 과거의 기억들을 추억한다. 자신은 아직 젊고 아들은 어렸던 그때의 기억(플래시백)은 사진(시각)과 화전(미각)을 통해 매개된다. 문득 커다란 결심을 한 엄마가 화전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가지만, 관객은 그게 이미 엄마가 죽음을 맞이한 뒤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엄마는 시골에서 서울로, 동시에 과거에서 현재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죽은 뒤이며 엄마를 도와주던 친절한 할머니가 실은 저승사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까지 엄마는 어쨌거나 서울에 온 것이 맞다. 영화가 몇 개의 씬을 할애해 그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서울로, 현재로 결코 올 수 없었고 동시에 온전히 그곳으로 올 수 있었다. 얼핏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올 수 없었다/있었다는 두 명제가 <안녕, 엄마>에서는 모두 성립한다. 다시 말해, 과거-감각과 현재-감각이 프레임 안에 공존하게 된다. 그러나 두 시간은 오래 공존하지는 못하고 곧 충돌한다. 영화의 표면에서 이 충돌은 엄마의 죽음으로 드러난다. 엄마의 죽음이 뒤늦게 밝혀지는 것은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드라마적 반전이라기보다는 과거와 현재라는 함께 있을 수 없는 두 개의 시간을 한 프레임 안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장치에 더 가깝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에 반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 영화에는 전지적 시점이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인칭 시점이 없이 (주로 엄마 쪽에서) 주관화된 서사에서, 엄마는 이미 죽었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서울에 도착해서야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 죽은 것이다.

이 영화가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시간이 추상적으로 개념화되어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 속의 과거와 현재는 구체적인 어떤 때라기보다는 과거 또는 현재라고 느껴지는 자의적으로 설정된 시간에 가깝다. 다시 말해, 과거가 과거로, 현재가 현재로 인식될 수 있는 근거는 우리(또는 연출자)가 그것이 과거 혹은 현재라고 받아들인다는 점 외에는 별로 없다. 각각의 시간이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묘사되는 까닭은 영화가 스테레오타입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지 이 시간들이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앞서 시간-감각이라고 표현한, 이 영화가 시간을 재현하고 그것을 가족의 죽음과 연관짓는 독특한 방식은 진부한 서사에 갇혀 그저 그런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 표면의 시간 구성은 다분히 정적이라는 것이 <안녕, 엄마>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각각의 쇼트들은 만화의 컷처럼 구성되어 있고, 쇼트 사이즈의 변화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영화가 쇼트와 씬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개별 샷들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흔히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영화의 탄생이라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에밀 레이노의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영화의 원초적인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떤 것이 최초의 영화인지 가려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애니메이션이 영화가 시작점 중의 하나라는 점은 틀림없다. 하지만 <안녕, 엄마>에서는 몇몇 장면에 사용된 효과들을 제외하면 이 영화가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를 찾기 힘들다. 이 영화는 쇼트의 차원에서는 애니메이션의 감각, (만화가 아닌) 시네마의 것을 알지 못했거나 잃어버렸다.

연출자는 독거 노인들의 고독사에 관한 뉴스를 보고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당장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 한 편을 본 뒤 어머니께 안부 전화 한 통을 넣는 작은 행동이 그래도 우리 삶을 조금이나마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연출자 자신에게도 언젠가 찾아올 어머니의 죽음과 그 전후를 미리 생각하고 연습하는 개인적인 의미—실상 많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도 갖고 있다. 이것들은 분명 꽤나 보편적이면서도 소중한 가치이고 나는 이러한 취지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문제는 이 가치들이 발현되는 방식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것에 있다. <안녕, 엄마>의 서사와 인물의 성격과 그림체와 목소리 연기는 다른 조합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일관적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거의 보지 않고서도 인물의 성격과 그들의 운명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호의적인 쪽으로 말을 바꾸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잘 어울리고, ‘가족을 소중히 여기자’는 메시지이자 감독이 처음 작품을 시작하게 만든 생각을 전달하는 데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안녕, 엄마>는 결코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 스테레오타입이 곧 보편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문제의식은 독거 노인들의 고독사라는 사회적인 증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만든 수많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다. 이런 영화는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모든 영화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녕, 엄마>는 효과적인 서사와 그를 뒷받침하는 제반 요소에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자신이 시작했던 문제의식의 지점마저 차단해버렸다. 이분법적으로 나뉜 인물과 세계는 (서사적으로는) 편리하지만 둘 사이의 모든 것들을 지나치게 생략하고 그것을 외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어떤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영화에게 그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 과제와 같다. 그 문제가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한 것이어서 결국에는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거기에 달려드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