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음악가

‘민중 엔터테이너’ 한받을 만나다

우리 학교 예술제에서 불현듯 번쩍이는 의상을 입고 맥북 에어와 함께 나타나 몇몇 학생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한 음악가를 본 적 있는가? 그의 이름은 야마가타 트윅스터다. 한때 아마츄어증폭기라 불리기도 했던 그는 한받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한때 우리 학교 영화과 조교였던 그의 현재 직업은 ‘민중 엔터테이너’다. 언젠가부터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스스로를 ‘민중 엔터테이너’라고 부르며 거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를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 현장에 들리는 것이다. 선의로 가득 찬 그는 투쟁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투쟁에 힘을 보태고 싶어 한다. 그런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우리 신문과는 10년 만의 인터뷰다. 그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그땐 아주 작은 코너로, 학교의 이색 조교 같은 걸로 인터뷰를 했었다. 영화과 조교로 일할 때다. 당시에 아마츄어증폭기로는 좀 알려져 있었다. 옛 영상원 건물 지하 편집조교실에 앉아 있으면 보통은 학생들이 들어와서 ‘조교님 키 좀 받아가겠습니다’ 하는 게 일상인데 가끔 학생들이 ‘조교님, 아츄 <극좌표> 앨범 한 장만 구매할 수 있을까요’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싸인까지 해서 판매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이름은 방과후 학교 강의실에서 벌어진 한 파티에서 DJ를 맡으면서 갖게 됐다. 그때 개러지밴드(애플에서 개발한 작곡프로그램)를 처음 가지고 놀던 때였는데, 마침 DJ 제의가 왔다. ‘그래도 DJ면 이름이 하나 필요한데’ 해서 만들어진 게 야마가타 트윅스터였다.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음악에는 예전 아마츄어증폭기 때와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음정과 가사가 많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춤추며 주문처럼 가사를 외울 때는 샤먼 같은 느낌도 준다.
샤먼 같은 모습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최근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음악들은 투쟁에 더욱 초점을 맞추며, 음악적으로는 다소 정체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지?
음악에 대해서는 확실히 나도 고민을 하고 있다. 조금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나는 공연을 위주로 활동하는데, 요새 공연이 진짜 많이 들어온다. 그래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조금 여유가 없다. 한편 개러지밴드로 음악 만드는 것이 하나의 기술처럼 완성되어버렸다고 할까? 마치 공장 시스템처럼(웃음) 노래를 쉽게 만드는 기술이 생겼다. 그래서 그날 그날 데모 상황에 맞게 쉽게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판에 박힌 듯한 그런 느낌으로 만들고 있는 단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음악가가 아니라 기술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웃음).

투쟁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음악에 대해서는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가 항상 지적한다. 요즘은 아내가 내 공연을 재미 없다고 안 본다(웃음). 최근에는 이런 진지한 얘기를 들었다. “음악이 정말 아닌 것 같다. 저건 음악가의 음악이 아니라 데모꾼의 뭔가다. 음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선동적인 구호의 반복이다”라고.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한다. 투쟁 현장에서 공연하면 상황이 진짜 열악하다. 랩탑을 길바닥에 놓는 건 대수고, 공연 직전에 리허설도 못 할 때도 많다. 음향이 잘 안 나오는 경우도 대다수다. 야마가타 트윅스터 음악은 소리가 빵빵해야 하는데, 아주 작은 소리에 힘들게 춤추곤 한다. 그럴 땐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아, 정말 열악하다. 이렇게까지 뒹굴어야 하나.’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공연이란] 나를, 내 음악을 바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정말 힘겹게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이 정말 흥겨워해주고 환한 미소로 응답을 준다. 그럼 힘겨움도 감내할 수 있게 되며 결국 어려움도 사라지게 되더라. 그래도 아내는 내가 음악적으로 신경을 안 쓰는 데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아내는 아마츄어증폭기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음악이 훨씬 더 좋았다고 한다.


아마츄어증폭기 때 같은 음악을 다시 안 하는 것인가, 못 하는 것인가?
못 하게 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아마츄어증폭기로 활동하던 당시의 감성이란 게 있으니까. 그때 음악은 부유하는 듯한 정서, 홀로 있을 때의 고독한 느낌에 대해 노래하는데, 결혼하면서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렇게 찌질한 노래를 계속 부르면(웃음).

 
음원 사이트에서 아마츄어증폭기 때 음악은 꽤 남아 있는 편인데 야마가타 트윅스터 음악은 거의 없다. 특별히 음원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투쟁의 현장에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위로해주고, 흥겹게 해주는 역할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공연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 개러지밴드로 음악을 만드나?
그렇다. 유동적인 상황에 대처하기가 쉬우니까. 야마가타 트윅스터라는 음악가는 미학적이거나 음악적인 완성도를 고려하기 보다는, 그때 그때 투쟁 상황에 맞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구적으로 음악을 이용하는 부분이 있다. 투쟁이 야마가타 트윅스터를 완전히 이용하도록 맡기는 그런 수준이다. 현재로서는 투쟁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는 게 중점이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음악에 대한 욕심이 많이 사라졌다. 나는 음악의 기술적 완성도에 대해서 정말로 관심이 없다. 기타를 잘 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걸 전혀 하지 않는다. 그게 나의 스타일이다. 어떻게 보면 펑크 영향을 받은 거지. 아마츄어증폭기를 10년 넘게 했는데 기타 실력은 하나도 안 늘었다(웃음).


클럽에서 공연할 때는 다르게 선곡하나?
홍대앞 클럽에서 불러주면 무슨 노래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또 익숙한 카드들을 꺼낸다. ‘찹쌀송’, ‘돈만 아는 저질’, ‘신사 아파트’ 같은 곡들은 항상 하는 레파토리들이다. 클럽에서 할 수 있는 노래들과 투쟁 현장에서 할 수 있는 노래들이 구분되는 편이다. ‘돈만 아는 저질’ 같은 경우는 예외적으로 어디서든 가능한데, 이 곡은 2010년에 나왔으니까 벌써 6년째 우려먹고 있는 셈이다(웃음).

가끔 각각의 노래들이 내가 고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고용주고, ‘돈만 아는 저질’, ‘찹쌀송’ 이런 것들이 내가 고용한 노래들인 것이다. ‘돈만 아는 저질’은 내게 심하게 착취 당하고 있는 노래인 셈이다(웃음).


한 해에 공연을 몇 번이나 하는가?
재작년 공연 횟수가 150번쯤 된다. 거의 이틀, 사흘에 한 번 꼴로 공연을 한 셈이다. 거의 대부분 길 위에서, 야외에서 했던 공연들이다. 모든 공연이 다 출연료가 높지는 않지만 워낙 많이 하니까 어느 정도 공연 수익 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작년에도 1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대단하다. 혹시 음원 수입에 관심이 없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은 아닌가? (웃음)
음원도 팔릴 것 같지도 않고. (웃음)


아무튼 공연 수익만으로 생계가 유지된다는 건 대단한 일인 것 같다. 그야말로 진정한 자립 음악가가 아닌가.
보통 감사비 정도만으로도 5만 원, 10만 원, 그 이상씩 주는 분들도 있고 하니. 10만 원으로 생각해도 100회 공연하면 천만 원이다. 1년에 공연 수익으로만 천만 원 이상은 번다. 근데 나는 그 돈들이 떳떳하다. 신용카드회사가 여는 페스티벌 같은 걸 통해서 버는 돈이 아니라, 사람들과 같이 연대하고 투쟁한 수고에 대해서 받는 돈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동지의식, 함께 간다는 느낌이 나에겐 훨씬 더 중요하다.

 
음악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영화를 했다고 들었다. 왜 영화를 하고 싶어 했나?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하얗게 다 타오른다면, 다시 영화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너무나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 버려서, 독립적으로 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은 어떻게든 민중과 연대하면서 자본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자본과 거리를 두고 할 수 있을까?

한예종과의 인연도 잠깐 얘기하면, 영상원 초창기인 1995년인가 1996년인가에 영화과에 지원했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1차에서 낙방했다. 그리고 나중에 영화과 조교로 취직했다. 어릴 때 극장이나 TV에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감동들이 영화를 계속 좋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도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몇 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만들었던 영화들은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이 실험적인 영화라고 부르더라. 지금 하는 음악도 대중적인 음악은 아니지만, 그 옛날 내가 만들었던 영화보다는 덜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영화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미숙하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찍었던 것이다.


지금은 영화를 안 찍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나는 시나리오 쓰는 걸 너무 싫어했다. 시나리오가 필요한 이유는 산업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보여줘야 투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점에서 어떻게 보면 즉흥성이라는 단어가 나의 영화와 음악을 관통하는 것 같다. 문학과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의 전통이 나는 계속 못마땅했다. 그래서 시나리오도 전혀 쓰지 않고, 배우 데리고 카메라 들고 어느 공간에 가서 막 찍었던 것이다. 그럼 산업으로 들어가기 힘든 영화가 만들어진다.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때는 레오 까락스나 왕가위 같은 사람들의 영화도 어디까지나 산업 안에서 통용되고 있는데 나는 거기서 누락됐다는 생각이 들어 절망에 빠졌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어디까지나 나는 미숙했고 그런 점들을 다듬을 수 있는 시간과 영화들이 더 필요했는데 20대 중반에 절망하고 멈춰버린 것 같다.


자립음악생산조합과는 같이 하는 활동이 줄어든 것 같다.
육아를 비롯해 개인적인 사정에 신경을 쓰다 보니 회의에 계속 참석하는 게 힘들다. 그래서 단편선이나 황경하 씨와 그때 그때 접촉해서 의견 나누는 식으로 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들어 자립음악생산조합이 음악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대공분실에서 공연할 땐 아무도 조합 소속 음악가들을 몰랐는데 2년 사이에 단편선과 선원들, 김사월X김해원 등이 주목을 받는 음악가가 됐다. 그런데 거기서 한받은 조금 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나는 음반을 정식으로 유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음악 산업의 시스템 바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자립은 지금 내가 가는 이런 길이다.

자립 음악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조악한 맛’이 있었는데, 그때랑 비교하면 훨씬 더 매끈해졌달까. 나는 잘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웰메이드에 대한 반감도 있다.


조합 내에서 따로 마찰 같은 건 없나?
그런 건 없다. 의견이 달라서 초창기엔 같이 하다가 지금은 나간 친구들이 많이 있긴 하다. 2009년에 아마츄어증폭기 <수성랜드>를 만들었을 때는 좀 상처를 받았다. 힘들게 만들었는데 매체나 비평, 평론 쪽에서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GQ》 같은 데서 연락이 와서 ‘올해의 남자’로 인터뷰했다(웃음). 나름대로는 음악 산업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바깥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데에 대해 전혀 언급도 없고 반응도 없었다. 그때 좀 크게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내 활동에 대해서 비평이나 매체 쪽으로 일부러 알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 흐름으로 쭉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얘기를 왜 했느냐면 알게 모르게 자립 안에서 나는 언제나 좀 외로운, 고독한 그런 느낌이 있다. 인맥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친구들은 비평에서도 인맥이 있고, 그런 것들이 작용하는 게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니, 한받이라는 사람을 음악가로 보아야 할까, 투쟁가 내지는 활동가로 보아야 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고민해왔는데, 나는 스스로 ‘민중 엔터테이너’라고 정의하는 편이다. 예전에 실험음악 하는 유석현 씨가 나를 일컬어 ‘전자 품바’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는데 그 표현도 참 마음에 들었다.

‘민중 엔터테이너’라는 말은 직접 고안한 것이다. 예전에는 민중가요 씬이 있었지 않았나. 1980년대에는 메탈 밴드도 민중가요 씬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홍대앞 인디씬에서 시작한 사람이 민중가요라는 이름표를 달고 활동하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대중 매체의 도구로만 쓰이던 기존의 엔터테인먼트를 민중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민중을 위한 엔터테이너, 민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로 접근하자고 생각했다. 대중 엔터테이너와 다른 점은 현장성에 있다. 그 거리에, 투쟁하는 그곳에 있는가 혹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무작위로 노출되는가의 차이 말이다.

나는 투쟁하고 있는 현장에서 공연할 때는 그 현장의 상황에 맞는 노래를 꼭 한 곡 만들어 가려고 한다. 새롭게 하는 에너지를 찾기 위해서다. 원래 하던 것만 하면 흥도 안 나고. 아까 말한 고민들은 계속 안고 가야 할 것 같다. 음악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을 한다면 한 단계 점프하는 순간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지금은 확실히 매너리즘, 정체기에 빠진 것 같다.


하지만 투쟁가로서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민중 엔터테이너라는 개념을 음악가나 투쟁가 중 어느 쪽도 아닌, 그 사이에서 부유하는 애매모호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음악가나 투쟁가는 이미 남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새로운 프레임을 짜는 것은 당연히 힘들 것이다.
민중 엔터테이너로 좀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계속 고민을 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민중 엔터테이너라는 말은 민중가요에서 따온 것이지만 실제 김민기 씨나 정태춘 씨 같은 분들의 음악은 엘리트적인 태도가 있다. 어디까지나 ‘예술가’로 남아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하는 음악은 지식인의 음악이 아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다가가 맞닿는 것이다. 아티스트나 작가, 지식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신을 놓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나를 놓아버리는 것, 그래서 투쟁 현장에 스며드는 것이다. 커트 코베인도 어떻게 보면 산업에서 꾸민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산업이 신화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아까 페이스북에도 적었지만 내 마음 속 영웅이 코베인에서 ‘콜밴(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이 만든 밴드)’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웃음).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리반 때랑 비교해 보면 훨씬 더 다양한 사안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맞다. 너무 많은 걸 하고 있다(웃음). 한의원에 갔더니 간을 엄청 과하게 쓰고 있다고 하더라. 좀 쉬라고 얘기하더라. 활동을 과하게 하는 것 같긴 하다. 내가 또 거절을 잘 못 해서 공연 요청 들어오면 거절할 수가 없다. 매번 투쟁 현장에 나가면 사실 많이 힘든데 응원해주는 사람들 생각을 많이 한다. 만날 때마다 ‘한받 씨 응원합니다’ ‘페이스북으로 잘 보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투쟁할 때 어떤 서사의 함정에 걸려들지는 않나. ‘건물주는 무조건 나쁜 사람’, ‘쫓겨나는 사람은 웬만하면 착하고 불쌍한 사람’ 하는 식으로.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런 걸 경계해야 하는데 투쟁 상황이다보니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노래도 그렇게 만들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그런 단순한 구도에서 잘 탈피해서 할지, 그것이 앞으로 숙제일 것 같다.


그는 거절을 잘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앞으로도 투쟁 현장에서 한받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무대도 없이 공연하는 그를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르지 말자. 그는 음악이라는 산업 체제를 벗어나 진정한 자립을 꿈꾸려 한다. 어쩌면 ‘민중 엔터테이너’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한받은 한 발짝씩 그것에 다가가고 있다.


김형도·서이다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2015.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