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스트 랜드>(2010)는 100분에 걸쳐 한 예술가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에 불현듯 나타나 그곳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에게 한줄기 빛을 선사하는 것을 보여주는, 재활용 쓰레기 같은 영화다. 이 영화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긴 하지만 일말의 진실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관객은 곧 빅 무니즈와 함께 차 안에 실려 리우 데 자네이루의 쓰레기 매립지 자르딤 그라마초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의 풍경은 실로 충격적이다. 쓰레기가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있다. (자르딤 그라마초 뿐만 아니라 모든) 대도시 근교의 쓰레기 매립지는, 근대 도시의 표면에서 오물을 감추는 댓가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여기엔 쓰레기가 정말 산처럼 쌓여 있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웬만해서는 그 존재를 눈치채기가 힘들다. 쓰레기들은 도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어떤 쓰레기 더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보면 그것이 빈민가에서 나온 것인지, 중산층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부유한 저택에서 나온 것인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쓰레기 매립지는 동시대의 거울에 비친 대도시의 허상과도 같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있다. 자르딤 그라마초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카타도르라고 부른다.
하지만 <웨이스트 랜드>에서 카타도르들의 진짜 삶—하루종일 쓰레기를 줍는다. 그 다음 날도 쓰레기를 줍는다. 또 그 다음 날도 쓰레기를 줍는다. 아니면 밤에도 쓰레기를 줍는다—은 일종의 마스터 쇼트처럼 등장할 뿐이다. 빅 무니즈가 그라마초로 향하고, 거기서 무니즈와 관객은 처음으로 카타도르의 삶을 목격하게 된다. 영화는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 이들이 진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단지 처음에만 보여준다. 일단 무니즈의 작업이 시작한 뒤에는 사실상 카타도르들의 삶은 지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무니즈의 작업이 시작될 때에도, 사진 작업이 완성되고 국제 경매에서 비싼 값에 팔릴 때도 수많은 카타도르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머리로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시각의 예술이며, 그것이 무언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쇼트를 보여주거나 이에 상당하는 시각적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그점에서 이 영화는 카타도르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니즈는, 그리고 영화는 애초에 몇몇 카타도르들을 ‘선택’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거의 극영화처럼 만들어져 있다. 선택받은 이들은 더 이상 재활용품을 줍지 않는다. 그들은 대신 쓰레기로 ‘예술’을 하고, 런던을 관광하고, 미술관에 가서 인터뷰를 하고, 궁극적으로는 쓰레기를 줍는 카타도르의 삶에서 벗어난다. 이게 단지 몇몇 카타도르에게만 찾아온 변화이며 그라마초에는 삼천 명의 카타도르가 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돈 많고 똑똑한데다 선한 의지로 가득찬 예술가와 가난하고 무식하며 고된 삶을 사는 노동자의 위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니즈는 자신 또한 브라질 출신이며 가난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점을 내세워 자신이 올라서 있는 특권적인 단상을 방어한다. 그는 자신이 차지한 지휘자의 자리에서 한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영화에는 심지어 무니즈가 상 파울루의 옛 집을 찾아가 자신의 가족과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씬도 등장한다. 도대체 자기가 예전에 살던 집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뭘 어떡하라는 것인가? 무니즈의 인터뷰에서 ‘나도 많이 힘들게 자랐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 때는 이보다 더 힘들었다’는 한국 기성세대의 노력 이데올로기의 다른 점을 찾기 힘들다.
비단 무니즈의 어릴 적 집을 보여주는 장면 뿐만이 아니다. 나는 자르딤 그라마초에서 찍힌 ‘아름다운’ 쇼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영화는 여기서 도덕이란 것을 잃어버렸다. 쓰레기 매립지를 아름답게 찍어서 도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쓰레기와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서도 미학적인 쾌감을 찾아내는 것이 과연 영화의 임무인가?
이 영화의 크고 작은 단점들을 요약하자면, 단일하고 완결된 서사를 보여주려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웨이스트 랜드>는 무니즈의 작업을 거의 숭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에 너무 쉽게 편승한다. 무니즈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듯, 서사의 욕망에 잡아먹힌 이 영화는 행복한 결말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르딤 그라마초에서 일하는 카타도르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무니즈와 그의 친구 또한 영화 안에서 한때 그것을 시인했었다—처음 봤을 땐 그들이 행복해 보였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그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무니즈가 카타도르 전체를 구원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무니즈는 단지 한 명의 예술가일 뿐이다. 물론 카타도르 한 명 한 명의 삶은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 중 몇몇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아가 도서관과 교육 센터가 지어지는 데 기여한 무니즈는 대단한 예술가임이 틀림없다. 나는 <웨이스트 랜드>가 그라마초의 수많은 다른 카타도르들을 보여주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들은 생략되거나, <스타 워즈>의 은하제국군 병사들처럼 다루어진다.
<웨이스트 랜드>가 보여주는 서사적 욕망의 중심엔 무니즈가 추구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 더 세속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꿈과 희망이 있다. 꿈과 희망은 너무 좋은 말이다. 하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줍는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라면 꿈과 희망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카타도르가 된 것이 꿈가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카타도르가 되었기 때문에 꿈도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사람들이 카타도르가 된 것은 꿈이나 희망 따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타도르가 되지 않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웨이스트 랜드>는 명백히 카타도르의 영화가 되어야 했다. 이 영화는 얼핏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기에는 지나치게 빅 무니즈의 영화다. 결국 영화가 말하는 것은 ‘빅 무니즈 만세! 현대 예술 만세!’ 이상이 아니다. 주인공이 됐어야 할 카타도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니즈의 ‘선한’ 예술 실험의 대상자에 머무른다. 무니즈가 그들을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영화가 그들을 그렇게 보이게 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웨이스트 랜드>는 결코 현재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빅 무니즈가 어릴 때 그렇게 힘들게 자랐지만 어찌저찌 해서 리우 데 자네이루의 카타도르들을 도울 만큼 대단해졌다는, 과거에 대한 영화다. 그래도 여기에 최소한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들었다는 데 최소한의 의의를 둘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