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리뷰 1> 일곱 번째: <한복자>(양익재) 리뷰
<한복자>를 처음 봤을 때 시작부터 끝까지 결코 떨칠 수 없었던 느낌은,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가 현실의 그것이라기보다는—그게 저승이든 판타지든, 혹은 무엇이든 간에—어떤 종류의 가상virtual 세계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느껴진 까닭에 대해서 길다란 목록을 작성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점이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그런 느낌을 주는 지점들과 다른 부분들에 대해 상세히 쓰기 전에 언어를 조금 정돈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어에서 ‘현실적’, 그리고 ‘비현실적’이라는 단어의 쌍은 다양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완전히 다른 뜻과 뉘앙스를 전달하므로, 이 단어들의 쓰임에 대해 미리 명확한 방침을 세우지 않는다면 수많은 오독의 여지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아마 글의 첫 문장에서도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어떤 것에 대해 ‘현실적’ 또는 ‘비현실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최대한 기본적인 의미만을 남겨놓으려고 한다. 한국어 사용자들의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 이 단어들의 쓰임은 많은 경우에 당위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그에 따라서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내가 이 글에서 어떤 것이 ‘현실적’이거나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할 때에 건드리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이 이미지 또는 사건 또는 인물이 ‘실재하는 세계에서 존재할 만한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어느 외진 강변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할머니(손영순) 한 명이 한복을 입은 채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오는 쇼트가 등장한다. 이 쇼트는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그 쓰임새와 별개로 굉장히 멋진 이미지임에 틀림없다(그리고 어느 정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때 빗소리와 함께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곧 화면 왼편에는 한글과 영문 제목(‘한복자’, ‘Homo Koreanicus’)이 등장한다. 이내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끊어지는 소리에 맞춰 전환되는 다음 쇼트에서 영화는 버스 터미널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있는 이 할머니의 옆모습을 미디움 쇼트로 보여준다. 이제 서사가 종료되고 크레딧이 오르기 전까지 영화는 이 터미널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때 이 통화 연결음이 어디에서 나는 것인지 잘 추측할 수 없는데, 한숨 소리와 함께 폴더형 전화기를 닫는 소리를 통해 할머니의 행동이지 않을까 추정은 할 수 있지만, 할머니가 전화기를 들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사운드는 영상과 유리되어 있고, 벌써 여기서부터 보는 쪽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현실적인 세계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암시(또는 착시)를 받기 시작한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서사의 설정 또한 비현실적이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 때문에 인물들은 추석을 앞둔 날에 버스가 오지 않는 터미널에 갇혀 있다. 영화 또한 자의로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터미널 안에 수동적으로 갇혀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어둡고 비 내리는 명절에 외진 시골에 있는 작은 터미널에서 서울에 가려는 사람들 몇몇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공포영화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별로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좋거나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또는 그런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명절에 태풍이 닥쳐오고, 도로가 파손돼 버스가 다니지 못한다면 비슷한 상황이 생기지 않으라는 법도 없지만, <한복자>의 설정만큼이나 표현 양식 또한 여기에 있는 이 세계가 일종의 가상적인 세계일 것이라고 상상하게 만든다(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의 연출자는 촬영 당시 결코 그런 방식의 연출을 의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장 현실적으로’ 찍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을 듣고 나서도 가상적인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영화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일종의 무의식적인 줄타기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복자>에는 인물 여섯 명이 등장하는데, 나타나는 순서대로 나열하면 한복자(손영순), 고석찬(정인기), 박동섭(정희태), 차장(이장유), 최말순(이선주), 오태민(오경주)다. 고석찬은 경상도 방언을 사용하는 노동자다. 그는 옆에 누가 있으면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딸이 얼마나 예쁘고 똑똑한지, 자기가 딸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서울에 있는 딸이 자기를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는 쉽게 흥분하는 편이며,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 (봉건적인 의미에서) 선량한 사람이다. 박동섭은 ‘거만한 서울 사람’이다. 적어도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은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부유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는 돈 없는 사람들(‘조선놈들’)을 무시한다(그런데 그가 왜 이런 시골 터미널에 이 사람들과 함께 갇혀 있어야 했는지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차장은 전라도 억양을 강하게 사용하는 사람으로, 책임감이 강하면서도 돈 또는 법으로 표현되는 권위 앞에서는 여린 사람이다. 최말순은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아들을 (말 그대로) 끔찍하게 챙기는 ‘극성 엄마’이며, 오태민은 그의 아들로, 군인이고, 엄마의 행동을 대체로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18분짜리 영화의 서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인물들이 모두 등장해 터미널 안에 자리를 잡는 부분이 첫 번째이며, 이후 버스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한바탕 혼란과 갈등을 거쳐 결국 사람들이 차장의 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는 부분이 두 번째다. 두 장면의 분기점은 인물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차장이 터미널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그가 매표소에 앉아 전등을 켜는 쇼트 앞뒤로 영화의 서사를 나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체가 하나의 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영화의 짧은 길이 때문이기도 하고 인물들의 감정적·육체적 상태가 상승/하강 곡선을 그리지 않고 일정하게(말하자면, 항상 미쳐있는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첫 번째 부분이 인물들을 소개하고 이들을 맞이할 잠재적인 문제(서울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를 설명한다면,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잠재적인 문제가 실현되고, 서울에 가기 위한 차선책을 구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갈등이 고조된다. 버스가 오지 못하고 내일도 올 것 같지는 않으므로, 차장의 차를 타고 서울에 가는 것이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는데, 이것이 작은 경차이기 때문에 적어도 한 사람은 여기에 탈 수 없다. 논의의 쟁점은 자연스럽게 한복자를 태울 것인가 말 것인가로 좁혀진다. 한복자 본인은 여기서 침묵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결국 나머지 사람들은 한복자를 터미널에 남겨놓고 서울로 떠난다.
이 영화는 실제로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고산터미널에서 촬영됐지만, 화면에서 보이는 터미널은 마치 일종의 무대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인물들을 (문자 그대로) 뚜렷하게 보여주는 데에 집착하는데, 많은 경우에 심도가 낮은 클로즈업을 사용해서 배경은 흐릿하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명은 대합실의 중앙, 그러니까 인물들이 앉아 있는 벤치만을 비추고 구석이나 뒷쪽은 그림자로 덮여 있다. 그 때문에 인물들이 앉아 있는 중앙과 터미널의 배경은 완전히 동떨어져 보이고, 이 배경은 사실상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영화가 암묵적으로 인물들 사이의 드라마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선언에 보는 쪽이 동의할 것인지는 따로 판단해야 할 문제다.
이 영화가 드라마에 집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셋 이상의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이어지게 된다. 특히 (앞서 언급한 ‘분기점’) 이후의 장면들은 대부분 이러한 여러 사람의 대화나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때 <한복자>는 지독히도 상상선을 지키지 않는다. 물론 상상선이 맞지 않는 장면은 기본적인 실수에 속하는 것이고(상상선에 대해 조금만 집중을 한 채 영화를 보면 후반부에서는 매 쇼트의 편집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연출자 또한 그점을 시인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특징은 이 영화 특유의 의도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감각과 만나 일종의 일관성을 만들어낸다. 즉, 영화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 비현실적인 느낌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인물들의 구성과 특징 또한 이 비현실적 감각에 일조하고 있다. <한복자>의 인물들은 전형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의미로) 상징적이다. 그리고 보는 쪽에서는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이면서도 흥미로운 화학 작용을 관찰할 수 있다. 영화의 제목(‘Homo Koreanicus’)과 이러한 인물들의 편성을 두루 고려했을 때, 보는 사람이 이 영화가 ‘한국적인 어떤 것’에 관한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는 일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한복자>는 분명히 한국의 지역갈등이라는 이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고 대립하는 서울, 경상도, 전라도와 거기에 얽혀 있는 계급의 문제, 한국의 유교적인 문화에서 교양에 속하는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명제, (사실상 병영국가에 가까운) 한국에서 군인의 존재, 자식의 삶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부모 등의 여러 가지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이 인물들을 이렇게 일종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영화의 시작부터 끊임없이 느껴지던 비현실적 감각이 무엇이었는지가 설명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터미널이라는 공간은 일종의 인공적인 실험실과 같이 작동하고, 영화는 이 실험실 안에 ‘한국적인’ 특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을 선정해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가두어 놓은 뒤, 그 자신이 함께 뛰어 들어 이 사람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반강제적으로 공존해야 할 때 과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추석이라는 시간은 현상을 촉진하기 위한 촉매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영화 전체가 가상적인 실험 내지는 시뮬레이션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결코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제 퍼즐은 어느 정도 맞춰졌지만 여전히 몇몇 조각들은 남아있다(그리고 나는 이것들을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영화의 제목은 <한복자>지만 여기서 한복자 본인은 실제로는 나머지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딜레마의 시발점에 가깝고,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오태민이다. 이 둘은 극중에서 거의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그 침묵의 의미는 상반되는 편이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한복자의 침묵은 ‘노인 다운’ 침묵이며 오태민의 침묵은 ‘군인 다운’ 침묵이다. 이것을 풀어서 말하자면, 한복자의 침묵은 대체로 그가 속한 사회에 의해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침묵인데, 일반적으로 그 나이의 여성-노인이 자랄 때의 사회는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겉으로는 고요를 지키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오태민의 침묵은 엄마의 억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주체적이며, 뚜렷한 입장이 있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고민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사람이 자신의 편에 서서 상황을 바라보게 만든다(다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가 아무리 고민한다고 해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면 왜 고민하는가?).
또한 혼란스러운 것은 (오태민의) 이 고민이 일반적인 윤리에 속하는 고민인가, 아니면 이곳이 한국의 특수한 문화의 장sphere 안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고민인가 하는 것이다. 영화는 스스로가 ‘한국적인’ 것에 관한 것이라고 여러 방법을 통해 암시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안에서 이 갈등과 논쟁을 적극적으로 ‘한국적인’ 것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쪽에서는 이 고민이 어떤 종류의 고민인가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인물의 감정과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부터를 힘들게 만드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크레딧이 올라가고, 곧 처음에 등장했던 쇼트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일종의 형식적인 수미상관의 구조를 취하는 것인데, 이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한 쇼트는 마치 입장과 퇴장, 아니면 실험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꽤 흥미로운 실험이었다. 그런데 이 실험으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