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 리뷰 1〉 두 번째: 단 한 편의 영화
‘단 한 편의 영화’를 고르라는 주문을 듣고 나서, 나는 마지막까지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2004)과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자코 반 도마엘, 2009) 사이에서 고민했다. 둘은 모두 십대일 때 처음 접한 뒤 거의 열댓 번씩이나 반복해 본 영화들이다.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이었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두 영화를 정확히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 우연한 기회에 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추천으로 본 것인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십대다운 맹렬한 감성으로 반복해서 본 덕에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이 영화들의 장면들이 하나하나 다 들어있고 나는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마다 그것을 돌이켜 볼 수 있다.
끝까지 하나의 영화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진이 빠져서 음악이라도 좀 들으면서 기분을 전환하기로 했다. 애플이 자랑하는 아이튠즈에는 보관함에 저장된 개별 곡에 사용자의 선호도에 따라 별 하나부터 다섯 개까지 평점을 부여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별 네 개 이상이 매겨진 곡들은 자동으로 ‘좋아하는 음악’ 재생목록에 정렬된다. 나는 평소에 음악을 들으며 가능한 성실히 평점을 매겨 놓았다가, 음악이 듣고는 싶은데 딱히 어떤 음악가의 음악을 들어야 할지 모르겠거나 그것을 고민하기조차 귀찮을 때에는 반자동적으로 생성된 ‘좋아하는 음악’ 재생목록을 무작위로 재생시켜 놓곤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재생 버튼을 클릭하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터널 선샤인〉을 고를 것인가 〈미스터 노바디〉를 고를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정말로 영화 같은, 또는 마법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좋아하는 음악’ 재생목록에 포함된 561곡 중 무작위로 결정된 첫 번째 곡이 Chordettes의 〈Mr. Sandman〉이었던 것이다. 이 곡은 〈미스터 노바디〉의 주제곡이다. 이 아름다운 음악의 첫 마디를 다 듣기도 전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나의 단 한 편의 영화로 〈미스터 노바디〉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음악이 나왔느냐를 가지고 두 개의 영화 중 어떤 영화를 글의 주제로 삼을 것인가를 점치는 것은 다분히 어리석은 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논리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나의 아이튠즈 보관함에는 〈이터널 선샤인〉의 주제곡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그중에서 어떤 음악을 듣고 그래 〈이터널 선샤인〉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곧바로 결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변명처럼 읽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단지 기분 전환을 위해 음악을 틀었을 뿐이며 〈Mr. Sandman〉이 재생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냉장고가 냉매를 돌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던 방 안에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순간, 마치 〈미스터 노바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는, 영화가 내 방으로 확장되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달되는 범위까지는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다. 머릿속에 들어있던 〈미스터 노바디〉의 장면 하나하나가 비디오 테이프를 빨리감기 할 때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나타난 음악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어쩌다가 이 영화를, 오래 그리던 그 영화를 다시 만났다. 이 영화를 몇 번씩이나 보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미스터 노바디〉의 가장 영화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미스터 노바디〉의 특권적 순간이다.
몇 년 동안 다양한 부류의 영화를 전에 없이 많이 보았지만 역설적이게도 어떤 영화를 보며 〈미스터 노바디〉나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서 그랬듯 진한 감동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몇 년 전 〈미스터 노바디〉를 두세 번째 혹은 세네 번째 보면서 느꼈던 마법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음악의 강력한 힘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음악의 힘에 이끌려서, 또는 단지 그 영화에 쓰였던 음악이 재생되었기 때문에 그 영화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라 하기보다는 그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 여러 겹의 감정들을 먼저 설명하는 편이 독자들을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이 음악’이 ‘그 음악’이라는 것을 인지한 순간과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순간 사이의 간격,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의 간격이었지만 그동안 이 단순하고도 기막힌 우연은 내 안에 침잠해 있던 감정들을 환기했다. 그 ‘사이의 감정’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예전의 내가 이 영화를 보며 느꼈던,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하기가 힘들고, 따라서 제대로 언어화되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동안 차곡차곡 내면에 쌓여왔던, 아마도 사춘기의 감수성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다소 비논리적일수도 있는, 그런 감정의 더미이다. 나는 거의 울컥할 지경이었다.
우리가 무언가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때—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그런 방식으로 편리하게 설명하곤 한다—사실 그것은 대부분 자의적 판단에서 비롯된다. 내가 지금 어떤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것과 〈Mr. Sandman〉을 듣는 일은 실은 별로 관계가 없는 별개의 행위들이다. 둘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고 연결지어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고 결론지는 것은 순전히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사고의 결과다. 분명 그것은 충분히 논리적이지는 않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연은 언제나 발명되는 것이다. 그것은 미리 그곳에서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 우리를 다른 길로 이끈다. 삶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비어있는 삶의 공간을 우리가 우연으로 채워 나간다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우연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우연(이라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실로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많은 영화들이—그것이 내러티브 영화라고 불리든,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불리든 간에—일부러 우연(의 재현)을 강조하거나 우연의 커다란 힘에 기대고 있다. 어떤 영화들에서는 우연이 핍진성을 뒷받침하기도 하며, 또 어떤 영화들에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 우연을 재현하기도 한다.
또한 우연은 곧 〈미스터 노바디〉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스터 노바디〉는 우연을 단순하게 핍진성의 근거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우연은 반복되어 서술되며 때때로 인물들의 동선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령, 브라질의 한 노동자가 해고되는 바람에 평소대로라면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야 할 시간에 집에서 계란을 삶았고, 그 냄비에서 생긴 증기가 집안에 만들어낸 미기후microclimate는 지구 반대편에 소나기를 내리게 했으며, 빗방울 중 하나가 하필이면 니모가 들고 있던 종이 쪽지 위에 떨어졌다. 쪽지에 적혀 있던 글씨는 잉크가 모두 번져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쪽지에는 니모가 길을 가다 우연히 안나와 감동적으로 상봉한 뒤, 안나가 연락하라며 적어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니모는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어쩌다 마주친 그녀를 다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니모와 안나의 사랑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1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나 글을 쓰는 지금이나 〈미스터 노바디〉에서 둘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영화 전체에서 보면 둘의 이야기는 실제로는—영화 안에서 어린 니모가 서 있는, 보다 실제에 가까운 쪽을 말하는 것이다—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며, 단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니모와 안나의 사랑 이야기를 포함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장면들은 수많은 가능성을 하나씩 검토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보면 〈미스터 노바디〉는 두 개의 선택지 사이의, 얼핏 보기에는 그저 공백처럼 보이는 곳에 있는, 그래서 하마터면 모두에게 잊혀질 뻔한 수많은 것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엄마와 함께 떠날 것인가, 아니면 아빠와 함께 남을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어린 니모가 고민하고 있다. 물이 담긴 유리잔에 떨어뜨린 잉크 방울이 어떤 모양으로 녹아들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가능성은 거의 무한해 보인다. 그런데 각각의 선택지를 선택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은 완전히 분리된 채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하고 간섭하며 그것들의 총합으로서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니모는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세 번째 길을 선택함으로써 이항 대립의 구조를 벗어난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마치 어떤 종류의 실험 같다. 어떤 세계를 창조하고 조건을 설정하는 것은 실험을 설계한 사람(어린 니모)의 몫이지만, 이후부터 이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까지 설계자가 모두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설계자의 의무이자 목표는 모든 사건들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변수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저절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관찰하고 검토하여 합당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영화가 한 어린 아이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수많은 일들의 집합에 불과하다면, 니모와 안나의 이야기가 그토록 절절하고 감동적으로 긴 시간 동안 이야기되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다시 말하면, 그저 상상 속의 인물들일 뿐인데도 왜 그들을 그렇게 중요하게 보여주는 것일까? 또는, 과연 나는 누군가에 의해 상상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질문해 볼 수 있다. 영화 안에서 그것이 상상 아니면 현실 둘 중 어느 쪽으로 판가름나는가는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어린 니모의 머릿속에서 니모의 미래들이 생성되긴 했지만 그가 미래의 자신들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니모의 미래들이라는 표현보다 미래의 니모들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아무튼 일단 가능성을 열어두면, 미래의 니모들은 나름대로의 자의식을 가지고 생활한다. 각각의 니모는 청소년다운, 또는 어른다운 태도로 혼란스러워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존중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상 속의 삶’들이 그것이 허구라고 해서 가볍고 열등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영화는 분량을 통해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가능성을 검토하는 과정이 영화의 분량을 대부분 차지한다. 사실상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실제(어린 니모)가 아니라 상상 속의 존재에 불과한 아무도 아닌 사람들(청소년 니모, 어른 니모, 노인이 된 니모) 또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들은 ‘우연히’ 진짜 주인공이 된다. 우연이 이들을 진짜 주인공으로 만드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미래의 니모들은 정말로 그저 상상 속의 존재에 머무른 채 스크린 위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을 통해 세상에 태어난 미래의 니모들이 어떤 선택지를 택하더라도 항상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크고 작은 파국에 휘말릴 때, 비로소 그들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재현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된다. 어떤 우연이 들이닥쳐 그들의 삶을 실실 비웃거나 소중한 것을 빼앗아 달아나거나 송두리째 바꾸어버리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아름답게 재현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니모가 계속해서 어떤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곧 다시 그것을 되풀이하거나 돌이켜 다른 선택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관찰한다. 우리는 곧 저 선택이 니모를 행복으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불행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거나 나아가 예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분법적으로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그 선택에 따라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이 펼쳐진다는 생각은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시간이라는 차원은 한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생은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뿜어진 담배 연기가 다시 담배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또는 매쉬드 포테이토(감자를 으깨어 만드는 요리)와 토마토 케첩을 한 번 휘저어 섞으면 다시는 둘이 분리된 상태로 돌려놓을 수 없듯이, 자칫 나쁜 선택을 택해서 어쩔 수 없이 ‘게임 오버’ 되더라도 대체로 진짜 인생에서는 그것을 돌이킬 길이 없다. 다시 넣을 동전도 없다.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당위를 강요하는 것은 정말로 ‘나쁜 (것이라고 여겨지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미스터 노바디〉는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을 절대 섞일 수 없는 둘로 나누어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넌지시 강요하려고 하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가상의 선택과 그 결과를 재현하는 데 자신의 절대적인 분량을 할애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문제시될 수 있는 구성 방식인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 영화가 어떤 선택이 좋거나 나쁘다고 직접 관객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좋은 것이었냐 또는 나쁜 것이었냐는 잣대를 가지고 그 선택을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상 속의 니모들이 충분히 자의식을 지니고 있고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들의 삶 또한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보인다는—모든 부분에 있어서 순전한 판타지처럼 보이지는 않게 만들어져 있다는—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여전히 지지하는 까닭은 〈미스터 노바디〉가 이 윤리적 지뢰들을 제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지뢰밭을 잘 피해 나가고는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어린 아이의 상상’이라는 보기보다 치밀한 극적 구조를 통해서, 그리고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현 방식(어른 니모를 연기한 자레드 레토의 새파란 눈빛에는 그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에서조차 분명 익살스러운 데가 있다)을 통해서 〈미스터 노바디〉는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지점들을 비교적 매끈하게 통과하고 있다. 우연히 닥친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우연히 얻은 행복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상자 안에 갇힌 채 마냥 날개를 퍼덕이는 비둘기처럼 말이다.2
이제까지 살펴보았듯 우연은 〈미스터 노바디〉의 핵심적인 극적인 도구로 작동하며, 여러 명의 아무도 아닌(nobody)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의 삶을 재현할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처음 탄생할 때에는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의 노바디Nobody를 고유명사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상상 속 존재에 불과한 그들은 아무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그러니까 그들이 수많은 우연을 겪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뒤에 보통명사 노바디nobody는 비로소 고유명사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가 된다. 이제 누구도 그가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과연 나는 누군가에 의해 상상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제 그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니모의 삶과 마찬가지로, 나의 생활도 우연으로 가득 차 있고 〈Mr. Sandman〉을 들은 그 순간 또한 나를 살아있게 하는 우연 중 하나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내가 가는 방향을 바꾸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할 때, 내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의 의미는 한없이 희박해지는 것 같다. 여기에 내가 있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특히 그가 아직 어린 아이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부모가 갈라서기로 해서 당장 엄마를 따라서 떠날지 아니면 아빠와 남아 있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자기 인생에 앞으로 펼쳐질 모든 선택들을 미리 상상하고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미스터 노바디〉는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복잡한 영화지만 앞으로 그 아이가, 또는 내가 진짜로 살아갈 인생은 돌이킬 수도 없을 뿐더러 그가(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복잡할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걱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영화가 끝난 뒤, 니모가 뛰쳐나간 세 번째 길에 어떤 우연이 들이닥치더라도, 그 우연에 맞닥뜨린 니모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되도록 그를 응원하고 싶다.
1 실제로 IMDb에서는 〈미스터 노바디〉의 장르를 판타지·로맨스·드라마로 분류하고 있다.↩
2 안이 들여다 보이는 상자 안에 배고픈 비둘기를 넣어 놓고 바깥에서 실험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버튼을 누르면 먹이통이 열린다. 비둘기의 특정한 행동과 정기적으로 먹이통이 열리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 그러나 만일 먹이통이 열리는 순간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면, 비둘기는 계속해서 날개를 퍼덕인다. 이를 ‘비둘기 미신 pigeons’ superstition’이라 부른다. 심리학자 B. F. 스키너의 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