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들은 나를 바꾸었다

〈비판 리뷰 1〉 첫 번째: 영화란 무엇인가?

나는 씨네필인가? 이것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얼마간 필연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던 질문이다. 실은 나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씨네필이라는 말을 알지도 못했다. 그 어휘를 알고 있었느냐 여부는 분명 이 질문에 대답하는 데에 일말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물론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어떤 정체성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것의 이름을 알고 호명할 수 있게 되는 때가 비로소 그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한 관객인가? 한 관객의 특성을 판단할 때에 살펴 볼 만한 점들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가 어떤 영화들을 보아왔는지가 가장 일차적이고 직관적인 자료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영화들을 보아왔는지 스스로의 궤적을 되돌아 살펴 봄으로써 내가 어떤 관객인지 대강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게 영화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필연적으로 나는 이때까지 내가 본 영화들의 집합을 근거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본 영화, 다시 말해 내 경험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답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영화란 무엇이냐는 의문을 품고 영화를 볼 때와 그런 의문 없이 영화를 볼 때, 그 영화들이 다른 방식으로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과거로부터 출발해 현재에 이르는 가상의 선형적인 틀을 설정하고, 지금까지 내 삶에서 영화에 관한 기억들(그것들은 불완전하게 마련이다)을 이 상상 속의 틀 위에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 뒤, 틀의 양 끝에 위치한 기억들—그러니까 나의 경험적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들)과 가장 최신의 영화—을 차례로 살펴 볼 것이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고등학생 시절까지의 나는 영화의 ‘일반적인 관객’은 아니었다. 어떤 종류의 총체성을 띤 ‘일반적인 관객’이라고 부를 만한 개인 또는 집단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또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선 여기서 ‘일반적인 관객’은 ‘극장에 가서 개봉 영화들을 보는 관객’ 정도로 해두자(또는 ‘고전적인 관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때 내가 영화를 좋아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강제적인 자율 학습 시간을 흘려보내는 데에 영화만큼 적절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율 학습 시간에 수능 공부를 하는 척 위장하며 자습실을 감독하는 선생들의 눈을 피해 영화를 보는 행위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영화를 봄으로써 원래 내가 하도록 강제받은 것을 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이미 나는 토렌트 클라이언트를 사용할 줄 알았고 (인터넷 강의를 본다는 명목으로) PMP와 랩탑 컴퓨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파일 형태로 공유된 영화들을 다운로드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나는 주기적으로 토렌트 커뮤니티 사이트를 헤집고 다니며 열의 넘치는 이름 모를 씨네필들이 업로드하는 영화 파일들을 수집했다. 그중에는 개봉 영화도 있었지만 좀더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어디선가 제목을 들어본 일이 있는 고전 영화, 극장에서의 흥행과는 별개로 토렌트 커뮤니티 내에서 ‘입소문 난’ 영화들이나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지만 생소한 영화들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9), 〈클로버필드〉,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2004), 〈미스터 노바디 Mr. Nobody〉(2009, 일찍이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레바논 Lebanon〉(2009,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등이 이때 본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이다.

그때 내가 처해 있던 환경은 내가 저 영화들을 보게 된 결정적이고도 우연한 이유였다. 고등학생이라는 신분과 기숙 학교라는 공간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고, 더군다나 파일 형태로 공유되는 영화들은 어느 정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습 시간에 몰래 학교를 탈출해 극장에 가는 것은 그냥 자습실에 앉아서 다운로드 받은 영화를 PMP로 감상하는 것보다 몇 배로 귀찮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자리잡은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당연하게도 환경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전공 과목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접하지 못했을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수십 편의 영화 리뷰를 쓰면서 영화를 보는 방식이나 양상이랄 것들도 많이 바뀌었다. 내가 저 영화들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나에게 상당한 감흥을 주었지만 나는 그 감흥을 제대로 언어화하지는 못했다. 기왕 당시의 기억을 되돌아 보는 김에 그때의 내가 느꼈던 감흥을 지금의 내가 글로 정리해 본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명성에 비해 지루했다. 그에 반해 〈이터널 선샤인〉과 〈미스터 노바디〉과 〈레바논〉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들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재미와 지지의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이야기 할 거리가 많이 남은 영화로는 〈클로버필드〉를 선택하겠다.

〈클로버필드〉를 보면서 나는 극단적인 핸드 헬드hand held 촬영에 충격을 받았고, 곧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촬영이 영화의 표면을(또한 얼마간의 내면까지도) 압도적으로 결정짓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단순히 〈클로버필드〉의 촬영이 굉장하기 때문이라고 여겼지만, 고민을 거듭할 수록 앞의 문장에서 말한 명제가 비단 〈클로버필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화에도 들어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클로버필드〉 이전에도 수많은 영화들을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클로버필드〉를 볼 때에 비로소 그 사실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클로버필드〉가 헐리우드가 오랫동안 공고하게 발전시켜온 전통적인 촬영 기법과 편집 양식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물론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는 수많은 영화들 모두가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헐리우드 영화는 촬영과 편집에 있어 샷/리버스 샷, 180도 규칙, 연속적인 편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고유한 영화 문법을 관객에게 학습시켜왔다. 미국 문화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많은 영화들도 헐리우드의 그러한 영화 문법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해왔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한국의 관객들은 그러한 영화 문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이미 그렇게 학습된 관객이 스스로 영화 이론을 공부하거나 헐리우드 식의 전통적인 영화 문법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드문 영화를 우연히 발견하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 편집’을 지향하는 헐리우드 영화 문법을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하여간 내가 기억하고 돌이켜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내게는 〈클로버필드〉가 말하자면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으면서도 헐리우드의 전형적인 영화 만들기 방식과는 조금이나마 동떨어져 있는 최초의 영화였다. 형식의 측면에서 살펴 보면 〈클로버필드〉는 정보 기관이 언젠가 수집하여 문서화해 둔 누군가의 캠코더에 기록되어 있던 영상 즉, 파운드 푸티지라는 맥락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거기에 더해 카메라를 전문적으로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평범한 캠코더로 찍은 영상이라는 설정에 기대면서 〈클로버필드〉는 비로소 Sci-fi 영화, 괴수 영화, 재난 영화를 포함해 헐리우드가 발전시켜온 통상적인 촬영과 편집의 문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 이 영화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것이 헐리우드 영화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는 이 영화가 헐리우드의 전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모종의 기대를 품고 영화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물론 학습의 결과로 그 기대는 거의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클로버필드〉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고 그와 더불어 헐리우드의 전형성에서 탈피한 영화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에게 충격을 안겼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는 내러티브가 부재하며 단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어느 날 뉴욕 한복판에 거대한 괴수가 나타났다는 데서 촉발된 어떤 비일상적인 상황들의 연속 뿐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이 영화는 내러티브를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다. 내러티브가 해체되었다는 주장은 내러티브 구현의 방법론을 헐리우드가 오랫동안 선택해왔던 방식에만 한정지을 때에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헐리우드 식 편집 방식은 어디까지나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한 가지의 특수한 방법론일 뿐이다. 단지 널리 이용되어왔다는 이유에서 그것이 절대적인 수준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객들을 끊임없이 학습시켜온 결과이지 그 방식 자체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가령 〈이터널 선샤인〉이나 〈미스터 노바디〉의 내러티브는 상당히 복잡한 플롯들의 교차로 이루어져 있다. 실은 이 영화들 또한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는 아니고(〈미스터 노바디〉는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어느 정도 작가주의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영화다. 그러나 어쨌든, 특히 촬영과 편집에서 두 영화를 지배하는 문법은 헐리우드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다. 반면, 〈클로버필드〉를 보며 헐리우드 영화가 전형성을 대담하게 파괴하는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내러티브 구성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극단적인 촬영 방식 때문에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클로버필드〉의 내러티브는 가장 단순한 편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Sci-fi 내지는 재난 영화답지 않게, 영화는 갑자기 괴물이 나타난 이유나 배경에 대해 거의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냥 불쑥 괴물이 나타났고, 사람들은 캠코더를 들고 도망친다. 괴물의 정체에 대한 과학적 추측이나 분석은 거의 없는데, 거의 모든 재난 영화에서 그 재난을 설명하는 ‘과학자’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곳은 어떤 공백이다. 영화는 미리 설정된 촬영 장비와 기술의 제약을 근거로 이 공백에 대비하려 한 듯 하다. 이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캠코더로 그것을 찍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동안 들고 있던 캠코더에 상황들이 찍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클로버필드〉는 개봉 당시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불친절하고 ‘멀미를 유발하여’ 집중하기 힘든 영화라는 비난도 그만큼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클로버필드〉에는 내러티브가 부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만 옳다. 나는 내러티브가 가장 단순한 형태로도 충분히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다른 정보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단지 괴물이 나타나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고 사람들이 살기 위해 도망친다는 것만으로 그것은 이미 충분한 내러티브다(이런 관점에서는 통상적인 내러티브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구분하기 쉽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을 그렇게 구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게 된다). 괴물은 어디서 왔는가, 국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가 따위의 정보까지 관객에게 모두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것을 보여줄지 말지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영화가 가진 자유인 것이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교에 다니다 보면 종종 듣곤 하는, ‘프레임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보다 거기서 무엇을 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경구가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클로버필드〉에서 괴물이라는 무지막지한 안타고니스트의 전사prehistory나 그에 대한 과학적 해석 등 Sci-fi 재난 영화가 거의 의무적으로 포함하는 요소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내러티브의 일부이다.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이고, 당장 살기 위해 뛰어야 하는데 저 괴물이 어디서 왔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캠코더를 조심스럽게 들고 괴물을 응시하거나 정부 또는 군의 비밀스런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고급 정보들을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폭이 좁은 카메라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현재에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들어가 있다. 카메라는 그 상황들의 우연한 증인이며, 그 물리적 존재감은 내러티브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렇듯 〈클로버필드〉에서 카메라의 물성이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버드맨〉에서 카메라의 물성은 완전히 지워지고 있다. 과거의 끝자락에서 꼽은 영화와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전히 자의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둘을 묶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역시 이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샷으로, 보다 정확하게는 몇 개의 샷을 교묘하게 이어 붙여 관객에게는 원 테이크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이다(정확히는 원 테이크라 할 수는 없지만 문장의 편의를 위해 아래에서는 원 테이크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분명 그것을 뒷받침하는 디지털 촬영 기술의 발전이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을 영화다.

〈버드맨〉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브로드웨이를 떠돌아 다닌다. 그러나 언뜻 우연하고 무질서한 듯 보이는 그들의 동선은 실은 매우 정교하게 미리 짜여진 것이다. 카메라는 역시나 치밀하게 계획된 세심한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카메라와 촬영자의 물리적 존재감은 극한으로 지워진다(당연히 거울에도 카메라는 비치지 않는다). 〈클로버필드〉에서 촬영자가 등장 인물이고 카메라의 물성이 극 전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대신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전에 없던 정도로 드러나는 카메라의 이동성mobility이다. 관객에게 주어진 ‘원 테이크 환상’과 더불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물들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카메라의 이동성은 실시간적이고 사실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이때 카메라의 움직임은 주로 인물들의 뒤를 좇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인물들의 뒷모습만을 비추는 것은 아니지만)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인물들이 가는 길을 앞서 가지는 않는다.

카메라의 이동성을 극도로 강조하기 위해 원 테이크를 사용함으로써 〈버드맨〉은 일반적인 범주의 샷 전환을 통한 편집, 그러니까 우리가 샷 몽타주라고 부르는 것들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했다. 많은 장면에서 세심한 동선 배치가 편집을 대신하곤 한다. 샷의 전환이 일어나야 할 때에는 미로 같은 복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오히려 〈버드맨〉은 그점에서는 연극에 가까운 점이 있다. 카메라의 이동 경로는 극 안에서 연극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를 여러 번 통과하며 그 점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영화에서 카메라의 물성이 삭제되면서 독특한 표면이 만들어졌는데, 정작 그것이 내러티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버드맨〉은 (극중에서 언급되기도 하는) 〈아이언 맨〉 비슷한 슈퍼히어로 영화의 하나인 것처럼 마케팅을 펼쳐 왔다. 특히 트레일러를 보면 다른 사전 정보가 없는 한 누구나 새로운 슈퍼히어로 영화가 나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내가 〈버드맨〉에 대해 알고 있었던 정보는 이전에 어떤 다른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광고로 나온 〈버드맨〉 트레일러를 본 어렴풋한 기억과, 이 영화가 꽤 재미있다는 몇몇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전부였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면 이것이 통상적인 슈퍼히어로 영화와 상당히 많이 다르게 ‘생겼기’ 때문에, 극의 중반부에 이를 때까지도 이 영화가 계속해서 이런 걸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휙 전환해서 ‘슈퍼히어로 영화다운’ 걸 보여줄 것인가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영화가 선택하는 건 전자인데, 그 결과 슈퍼히어로 영화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에 온 관객은 〈버드맨〉이 굉장히 진지한 영화라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버드맨〉이 슈퍼히어로 영화를 해체하는 영화인가? 그로부터 탈피한 영화인가? 나는 그런 생각에는 반대한다. 마케팅의 단계에서 〈버드맨〉은 슈퍼히어로 영화인 척하고, 영화 안에서는 의도적으로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언급한다. 자신은 그런 영화들과는 뭔가가 다르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그러나 〈버드맨〉은 아무 것도 해체하지 않고, 어떤 것도 전복시키지 않는다. 전복된 것은 〈버드맨〉이 슈퍼히어로 영화일 것이라는 관객의 기대 밖에 없다. 〈버드맨〉의 인물들이 문제에 봉착하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방식은 영화의 표면과는 상관없이 매우 슈퍼히어로 영화의 그것과 닮아 있다. 결과적으로 〈버드맨〉의 서사는 결국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반복된 전형적인 서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특별하다면 그 근거는 형식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내용 없는 표면만의 변화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다시 말해, 〈버드맨〉의 경이로운 원테이크 촬영은 촬영 기술 그 자체에 대한 페티시적인 열정 이상이라고 평가하기는 힘들다.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총체적 질문에 성공적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일단 영화를 이루는 측면들을 하나씩 성실하게 살펴 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효과적이지 않나 싶다. 다른 예술 매체에 비해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굉장히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고,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그 동안 영화는 계속 변화해왔는데(또한 앞으로도 변할 텐데) 기존에 있던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그 변화들의 이끌어낸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기술 가운데 촬영 기술이야말로 말하자면 핵심적인 쪽에 속하는 것이다.

카메라의 존재감이란 모든 영화에서 특이할 만한 점도 아니고 누군가가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카메라 그 자체가 영화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의 물리적 존재감이 세심하게 고려되었는가의 여부는 내가 어떤 영화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서, 나는 씨네필인가? 아직도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영화를 본 기억과 영화에 대해 쓴 글이 축적되면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상당히 다른 관객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한편, 영화란 무엇인가? 나는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영화에 대해 아는 것 중 한 가지는, 어떤 영화들은 나를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나의 삶에서는, 우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