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페미니즘을 정리해 보았다

《카메라를 든 여전사》(아이공 엮음) 중 〈희생자의 정치에서 생산자의 미학으로: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을 중심으로〉(김일란)를 발제했다:

글의 첫머리에서 한 쌍의 그림이 언급된다. 실비아 슬레이의 〈길게 누운 필립 골럽〉은 벨라스케스의 〈화장하는 비너스〉을 패러디한 그림이다. 〈화장하는 비너스〉는 관람객에게 지극히 남성적인 시선으로 여성의 육체를 관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와 달리 〈길게 누운 필립 골럽〉에서는 여성 대신 남성의 몸이 전시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남자의 보기 좋은 육체를 〈화장하는 비너스〉에서처럼 편안하게 훔쳐볼 수가 없다. 그가 거울을 통해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위치에 남자를 가져다 놓을 수는 있지만 똑같은 효과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김일란은 이것을 “여성과 남성의 누드 이미지를 역전시킴으로써 기존의 여성과 남성의 역학관계를 바꾸려는 시도”라고 평가한다.

<억압된 다수 Majorité Opprimée〉(Eléonore Pourriat, 2010)라는 프랑스 단편 영화가 있다. 〈길게 누운 필립 골럽〉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그 속 세계, 즉 디제시스에서 남성과 여성의 자리를 문자 그대로 뒤바꾸어 놓았다. 이 간단한 설정에서 이 짧은 영화의 가장 큰 힘이 생겨난다. 현실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학관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다른 영화들에서 이 관계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비추어지는지(나아가, 영화 스스로가 앞장서서 여성을 어떻게 비추는지) 관객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된 다수〉에서 여성과 남성이 단순히 자리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우리는 그 일상적 순간들을 다른 영화를 볼 때 그러하듯 편안하게 볼 수가 없다. 특히, 이 영화 속 세계가 남성과 여성의 자리가 뒤바뀐 곳이라는 점이 명확하게 밝혀지기 전까지의 장면들을 보는 동안 관객들은 사뭇 혼란스러워하기를 권유받는다. 그렇다고 그 설정을 이해한 뒤부터는 모든 것을 납득한 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그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극적 장치들이 등장한다). 남성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가 가망이 없는 자가 아니라면) 말하자면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며 영화를 보게 되는데, 다른 자리에서 본 세상은 그야말로 불합리한 상화들의 연속체나 다름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의 충격은 더욱 크다.

재미있는 것은 명백한 연출에 의해 서사가 전개된다기보다는, 마치 남성과 여성이 뒤바뀌었다는 단순하고도 정교한 설정이 먼저 존재하고, 이야기는 그 설정에 의해 그저 저절로 자동 기술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부장 제도 혹은 남성중심주의 혹은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의 억압적 질서가 강력하고 (아직까지는)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로 돌아와서, 이 글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다양한 경향들을 소개하고 현재에 사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참조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간략하게 논의하고 있다. “70년대는 페미니스트들의 이론적, 정치적, 실천적 의제들이 예술작품의 내용을 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양식을 실험하도록 자극했다. 그 당시의 의제들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페미니즘의 지형은 70년대의 것이 보다 분화된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따라서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의제와 전략 그리고 그 한계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의 문화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한다.”

70년대에 들어가기에 앞서 프랑스의 68혁명이 먼저 언급된다. 오늘날 우리는 68혁명을 일종의 시발점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서구를 뒤흔든 운동이었으며, “이원론적인 서구철학에 대한 비판, 전통적인 합리적 주체 개념의 종말, 이성에 대한 회의, 계보학적 패러다임의 전이(정의의 문제에서 주체의 문제로), 진리 관념의 와해,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들을 전제하고 있다.” 68혁명 때 단초를 마련한 담론들은 7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분화하기 시작했는데, 페미니즘도 예외는 아니었다.

70년대는 “유효하지만 다소 낡은 듯한 정치적 의제들과 새로웠지만 정형화된 미학적 양식들이 공존한 양가적 시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2015년) 70년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앞서도 언급했듯 당시의 의제들이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때 수면 위로 드러난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가 정치, 경제적인 토대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면서 문화의 유물론적인 지위가 확보된 가운데,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각 이론지형 속에서 발생했”다. 마르크시즘은 “자본주의적 관계가 비강제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 문화 분석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은 특히 대중 문화의 이데올로기 기능을 연구하는 데 집중했다.

70년대 페미니즘은 “여권 신장을 위한 사회운동 차원을 넘어 보다 다양한 시각과 경향—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마르크시즘적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등—으로 분화되면서 다양한 흐름들을 형성했다.” 성차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차이에는 어디에서 오는가에 따라 평등지향적 페미니즘과 차이지향적 페미니즘을 가를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네오페미니스트(정치와 정신분석 그룹)’과 미국의 ‘여성중심론자(급진적 페미니스트 그룹)’으로 대표되는 차이지향적 페미니즘의 전략은 “여성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단지 다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본질적인 여성성을 평등의 전제로 내세우며 여성성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고 여성을 신화화하기도 했다. 때문에 성별 간의 차이는 문화적, 사회적 제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보는 구성주의적 페미니즘과는 대립하기도 했다.

이렇듯 다양한 흐름들이 있지만, 어쨌든 당시 페미니스트들에게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여성주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었다.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그들만의 시각으로 문화 현상과 예술을 연구하고 예술적 실천을 이루기도 했다. 여기서는 영화, 미술, 비디오, 사진을 포함하는 시각문화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시각문화연구는 세 가지 정도의 실천적 전략을 지니고 있었다.” 지면을 아끼기 위해, 각각의 전략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기 바란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말하면, 그것은 기존 시각문화에서 여성이 어떻게 전형화된(왜곡된) 이미지로 드러나는가를 분석하고, 거기에 침투해있는 무의식적 층위의 남성적 이데올로기를 발가벗기고, 나아가 새로운 여성적 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문화 연구의 영역에서 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실천을 살펴보기 위해 김일란은 네 가지 쟁점을 제시하고 각각의 쟁점에서 살펴볼 만한 학자들과 작품을 소개한다. △‘여성작가의 발굴, 재현된 여성 이미지  분석, 남성중심적인 문화 제도에 대한 비판’, △‘시각 문화 속에 침투되어 있는 남성주의적 무의식, 시각성, 여성의 욕망, 몸’, △‘포스트모던한 표현 양식 혹은 비주류적인 표현 양식과 여성적 표현 양식에 대한 요구’, △‘새로운 의제로서의 정체성의 정치, 구성주의적 입장’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쟁점을 다 살펴보지는 않고, 내 기억에 특히 남았거나 수업에서 좀더 이야기해 볼 만한 주제가 생각난 항목을 한두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모든 내용을 심도 있게 설명하는 것이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잘 정리되어 있는 글을 굳이 난도질해서 옮기기에는 종이가 너무 아깝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쟁점에서 로라 멀비가 등장한다. 멀비는 “페미니즘적 재현 비판에서 정신분석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최초로 주장한 이다.” 그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1975)에서 “영화에서 시각의 능동적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수동적 대상이 된다는 이분법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인 심층적 분석을 시도했다.” “파편화된 여성의 몸은 남성들의 욕망을 담은 내러티브에 의해서 봉합된다.” 남성 학자 중심의 영화이론에서 그동안 배제되어왔던 여성성의 문제를 드러내고 대안적 영화이론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여성을 이미지화하기 위해서는 대안적 이론, 미학적 실천의 기반이 필요”하다.

나는 지난 2월 방송영상과 졸업상영회에서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하고 GV를 진행한 적이 있다. 덕분에 상영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극장에 반쯤 상주하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영작들을 모두 스크린에서 지켜 보았다. 그중에서 〈선미〉(허나윤, 2015)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논의해 볼 만한 내용인 것 같아서 소개하려 한다. 선미는 질과 자궁이 없이 태어났지만 다른 모든 점은 (어디까지나 남성적인 관점에서 보건대) 여성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성적인’ 긴 머리를 포함한 ‘여성적인’ 외모, ‘여성적인’ 의상과 ‘여성적인’ 취향, ‘여성적인’ 행동거지 등. 자신의 ‘여성성’을 증명하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단지 질과 자궁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말하면 이성애적 성행위의 표준인 삽입 섹스가 불가능하고 여성의 당연한 사회적 의무로 여겨지는 출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선미는 상처 받아왔고 또 상처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감독의 기획 의도는 여기까지 잘 들어맞는다). 한눈에 보기에는 ‘여성적’이고 스스로도 ‘여성적’이기를 바라는 선미가 단지 질과 자궁이 없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여성적’일 수 없다면, 여성성은 질과 자궁의 존재에서 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선미를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전형적이고 다른 말로 하면 가부장적이다(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전형적이라는 단어는 가부장적이라는 단어와 실질적으로 동의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영화는 마치 ‘선미는 질과 자궁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을 뺀 다른 모든 점이 ‘여성적’이기 때문에 선미는 ‘여성적’이라고 불러 주어야 하지 않겠니’ 하고 넌지시 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지극히 남성적 관점에서 도출된 ‘여성적’인 특질들이 선미의 여성성을 변호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좋은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전형성 안에 갇혀버린, 결과적으로는 왜곡된 여성성을 재생산해내는 데 일조하는 다소 안타까운 영화라고 평하고 싶다.

한편, 린다 벤글리스 또한 두 번째 쟁점에서 언급된다. 그는 시각문화에서 주체로서의 남성과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기 위해 “보는 여성, 행위하는 여성, 주체적 여성을 대두시켰다.” 작업에서 그는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를 발가벗기고 도발적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남성의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것과 여성이 당하는 모욕을 폭로하려는 의도는 경계가 희미해진다.” “의도와 효과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난해하고 미묘한 문제일 수 있다.”

이 대목에서는 간혹 인터넷 신문에서 ‘해외 토픽’ 따위의 카테고리를 통해 보도되곤 하는 주로 해외의 여성 (반)나체 시위 생각이 났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신체를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당하는 억압과 폭력을 보여주려는 의도이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특히 인터넷 상에서 소비되는 방식이다. 대개 이런 기사들은 여성들이 왜 거리에 나섰는지, 왜 이런 방식을 택했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강조되는 것은 ‘여성들이’ ‘누드’로 ‘거리에 나섰다’는 사건의 표면 뿐이다. 이 기사들은 자극적인 헤드를 달고 다른 기사 하단에 연예인 기사와 함께 링크되는 경우가 많고, 간혹 누군가(아마도 남성일 것이다)에 의해 남성 사용자 비율이 높은 커뮤니티 사이트로 퍼날라져 지극히 남성적인 시선에서 피상적으로 소비되는 일도 왕왕 있다. 7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가장 먼저 그때에 비해 인터넷이 훨씬 더 일반적으로 보급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영화를 비롯해 많은 문화 현상이 이제는 일정 부분 인터넷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마사 로즐러의 작업이 일종의 과거로부터의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불쾌의 전략’이다. 마사 로즐러는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되 아주 멀리서 고정된 샷으로 잡거나 하는 식으로 시각적 쾌락 대신 지루함과 불쾌감을 조성함으로써 기존의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페미니즘은 흑인 페미니즘, 레즈비언 페미니즘 등 여성 내부에서도 다양한 차이를 지닌 이들이 중요하게 부각되며 단일한 범주로 여성정체성을 논의할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하며 일종의 자기모순과 혼돈에 빠진다. 김일란은 “이 혼란스러운 질문들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 역동적이라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혼돈은 곧 여성의 해체가 아니라 여성에 관한 지평이 확장된 것이라 본다. 따라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의 지점과 연대의 전략이다. 즉, 연대의 지점을 다층화할 수 있는 의제를 생산하고 그러한 의제들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며 글을 정리하고 있다. 마지막 몇 단락들에 붙은 소제목은 ‘2005년, 현재를 향해 열린 과거를 느끼면서’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2005년’을 ‘2015년’으로 대치하더라도 이 글이 별다른 위화감 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닐 테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지금 70년대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