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게 다다?

이미지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는 플라톤적 사고와 에피쿠로스적 사고로 나뉜다. 플라톤은 이미지는 어떤 빛이 대상에 비쳐 만들어내는 환상이므로 우리는 고개를 돌려 실제 대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그 실제 대상을 이데아라고 불렀다. 이것을 알레고리화 한 것이 유명한 동굴의 비유다. 플라톤을 계승한 주지주의적 사고는 이후 서양철학사에서 절대적인 주류의 흐름이 되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보는 것이 환상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보는 것이 곧 실제에 다름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에피쿠로스적 흐름에서는 당시의 인간이 다가갈 수 없었던 대상(가령 천체 같은 것)에 대해서는 그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설사 그것들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옳다고 생각했다. 가령, 달이 떴는데 반달이면 그건 달이 정말 반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달이 그믐이 되었다면 그건 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적 사고를 감각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과 동시대를 살았던 에피쿠로스에서 로마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로 이어지는 이러한 감각주의의 계보는 오늘날까지 분명히 이어져오고 있다. 예컨대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러하다.

에피쿠로스식의 감각주의적 사고는 플라톤적 사고의 강력한 헤게모니에 짓눌려 철학사에서는 좀처럼 그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해왔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현대 과학/기술에 대해 사고하는 데에 이미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왜냐하면, 고도로 전문화된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우리 문명의 핵심적인 토대이지만, 외향은 점점 투명해져 사실상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 이후의 현대 물리학 또한 상황은 비슷하다. 원자핵을 구성하는 소립자가 또다시 여섯 가지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고,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장이라고 주장하는 현대 과학의 성과들에 대해, 일반인들은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자연 언어로 번역된 문장과 알레고리들을 이해할 뿐이지 그걸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 원리를 진짜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과학적 원리 그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어떤 연구의 경우 연구 대상의 존재 여부조차 연구자 본인을 제외하고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과학/기술의 존재 양상은 유령이나 허구에 가까우며, 특히 싸이파이(sci-fi)와 같은 장르와 결코 다르다 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에피쿠로스적 감각주의 사고는 (결코 표면적으로 논의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나 진중권 같은 사람들은 '가상에 대한 믿음이 결국 실존의 조건이 된다’는 생각이 마치 디지털의 출현으로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라 주장하지만 실은 이미 에피쿠로스가 이천 년쯤 전에 말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 점에서 <그녀>(스파이크 존스, 2013)는 참고할만한 텍스트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과학/기술인 운영체제가 일말의 개연성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이 이해하는 과학/기술이 픽션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감독이 염두에 두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영화는 ‘그 이미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설사 그것들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옳다’는 에피쿠로스적 상상력을 가장 관객들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인간 남성과 스스로를 사만다라고 이름 붙인 운영 체제가 인간들끼리의 사랑에 비견할 만한 감정을 공유한다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만다의 존재 형태만 인간 여성으로 치환한다면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서사를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사만다라는 운영 체제의 존재 양식은 전혀 사려깊게 설명되지 않으며,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은 ‘그녀’가 뛰어난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으로 합리화되거나 표면적으로 포르노에 가까운 선정적인 장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감각에서 지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대체로 설득되는 이유는 <그녀>가 과학/기술을 취급하고 자신의 서사 안에서 소화해내는 방식이, 관객 자신들이 영화관 밖에서 오늘날 신기술이나 과학의 새로운 지평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익숙히 취해오던 방식과 근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싸이파이 영화에는 최소한의 개연성이 필요하다. <그녀>는 오늘날 사람들이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독해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에피쿠로스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는 점을 ‘악용’해 최소한의 개연성이 부재한다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덮고 넘어가려 한다. 에피쿠로스적 상상력이 여전히 우리의 사고 방식 안에서 알게 모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되며, 그것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할 때 비로소 이러한 영화들이 어떠한 기만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지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뮤직비디오를 찍던 경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파이크 존스의 미감을 칭찬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의 뛰어난 비주얼은 개연성의 부재가 드러내는 빈틈을 봉합하는 임시방편에 다름 아니다(훌륭한 비주얼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만적이다. 이제 우리는 달lunar이 사실은 반달이어도 둥글고 그믐이어도 둥글다는 걸 알고, 그걸 부정하려 들면 미친 사람lunatic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