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수업 시간, 방학을 통과하며 어떤 것이 바뀌었냐는 정성일 선생의 질문에 좀 머뭇거리다가 별로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난 학기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결코 영화 비평에 특별한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비평이 흥미롭고, 비평을 계속 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비평을 쭉 하게 된다면, 2015년 상반기가 중요한 계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글의 처음 몇 부분은 항상 곤란하게 마련이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우선은 내가 어떤 영화를 보아 왔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무엇을 느꼈는지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생각이 정리된 뒤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데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써야 하는 분량은 적지 않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이 글의 주제는 ‘나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는가’보다는 ‘나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에서 무엇을 보게 됐는가’가 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싸이파이(Sci-fi) 영화 또는 싸이파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분류될 수도 있는 영화들을 재미있게 보아 왔다. 그러나 내가 결코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총량은 그렇게 방대한 것은 아니다. 싸이파이 영화에 대한 내 선호는 기껏해야 중등교육 시절까지 접했던 많지 않은 동시대 영화들에 의해 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때 동시대란 전자 애니메이션 기술(computer-generated technique, CGI)이 본격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던 시기였다. 나의 동시대는 <죠스 Jaws>(Steven Spielberg, 1975)에서처럼 지금의 기준으로는 빈약한 상어 모형이 관객들에게 리얼한 공포를 가져다주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죠스>는 옛날 영화가 됐다. <괴물>(봉준호, 2006), <아바타 Avatar>(James Cameron, 2009) 같은 영화들이 한 편씩 개봉할 때마다 전자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영화의 화면은 점점 더 정교해져갔고 나는 거기에 큰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적어도 이런 류의 영화들을 볼 때에 나는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다(어차피 이야기는 다 똑같았으니까). 그보다는 영화의 표면이 중요했다. 이 영화는 얼마나 독특하고, 그러면서도 나름의 근거가 있어서 내적인 신빙성이 있는 비주얼을 내게 제공하는가? <클로버필드 Cloverfield>(Matt Reeves, 2008)라든가 <원티드 Wanted>(Timur Bekmambetov, 2008) 같은 영화들이 지금까지도 몇 번씩이나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클로버필드>에서는 뉴욕 시 시내가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괴물에 의해 파괴되는데, 영화는 이 침공을 피해 달아나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들고 있는 캠코더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캠코더의 리얼함(인물이 정말로 이 캠코더를 들고 뛰고 있다!)은 영화에 사용된 특수 효과를 정말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촬영했을 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종류의 감각을 가져다준다. <원티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인들보다 심장 박동이 훨씬 빠르고 월등한 동체 시력과 순발력을 갖추고 있어서 총알을 가로 방향으로 휘게 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전자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휘어져 나가는 총알의 모습은 꽤나 독창적이고 멋지다.
앞서도 말했듯 이런 영화들을 볼 때 나는 이 영화들의 다른 부분, 특히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클로버필드>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며, <원티드>를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가만으로 평가하자면 클리셰로 뒤덮인 재앙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디아틀로프 The Dyatlov Pass Incident>(Renny Harlin, 2013)나 <유로파 리포트 Europa Report>(Sebastián Cordero, 2013) 같은 영화도 재밌게 봤다.
전자 애니메이션은 점점 흔히 사용되기 시작해서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들에는 사실상 포스트 프로덕션의 필수적인 과정이 됐다. 당연히 옛날에는 싸이파이 영화의 전유물이던 전자 애니메이션은 대부분의 액션 영화와, 예전에는 특수 효과를 굳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장르에 속하는 많은 영화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러스트 앤 본 De rouille et d’os>(Jacques Audiard, 2012)에서 스테파니의 잘린 다리를 표현하기 위해 그린 스크린 크로마 키(chroma key)를 응용해 사용한 예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이다(마리옹 꼬띠아르에게 무릎 아래까지 오는 녹색 스타킹을 신긴 채 촬영하고 나중에 무릎에 3D 모델링을 덧씌웠다). ‘컴퓨터로 그린’ 장면이 실제 우리가 보는 영화에서 얼마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유튜브에서 ‘CGI Magic’이나 ‘Special Effects’ 등의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쏟아져나오는 영화 메이킹 영상들을 몇 편만 살펴봐도 실감할 수 있다. 그건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놀랍다. 이쯤 되면 영화를 애니메이션의 하위 범주로 놓아야 하며, 첫 번째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라 에밀 레이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한동안 화제가 됐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George Miller, 2015)를 드디어 봤는데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매드 맥스>는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영화들 중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a>(George Méliès, 1902) 다음으로 특수 효과라는 것을 과감하고 아름답게 사용한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그 표면에 전혀 매혹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너무 재미있게 봤지만, 마지막 쑈트가 지나난 직후에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냐 아니냐를 놓고 앞서 벌어졌던 일련의 논쟁 비스무리한 것들(당연하게도 이게 페미니즘 영화일 리가 없다)에 대해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물론 이 영화와 그 영화는 다른 영화이기 때문에 단지 영화들 사이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차이가 영화 사이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거의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는 사실 아직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가 왜 좋은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보다 이 영화가 어째서 이토록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힘든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예전의 내가 좋아했던, 지금도 충분히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을 표면에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자 애니메이션이 이제 영화에서 단지 쑈트에 현실감을 더하거나 과장할 것을 과장하고 빼야 할 것을 빼는 정도를 지나 인위적으로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때 만들어진 다른 수많은 영화들을 다 챙겨보지 않아도 <매드 맥스>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분명 내가 느꼈던 ‘그’ 희열의 한 구석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 희열이 예전처럼 같은 영화를 몇 번씩 반복해서 보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 기억될 만큼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떤 근본적인 쟁점들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매드 맥스>를 본 직후에 닥쳐온 그 무감각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기로 했는데, 영화가 그저 시각적인 유희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영화를 왜 보는가? 나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싸이파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며 우회로를 택하려고 한다. 싸이파이 영화는 ‘과학적 공상’을 포함한 영화이며, 다소 필연적으로 미래의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싸이파이 영화들은 주로 21세기를 배경으로 그야말로 공상적인 과학 기술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은 지금 보기에는 대개 빗나간 예측이거나 지나치게 촌스러운 것일 때가 많다. 21세기 들어, 특히 2010년대 이후로 싸이파이 영화들은 도리어 더욱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할 때가 많아졌다. 이런 영화들의 배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브라질 Brazil>(Terry Gilliam, 1985)이나 <제5원소 The Fifth Element>(Luc Besson, 1997)에서처럼 미래 인간들이 정체불명의(그러면서도 확실히 멋지기는 하다) 의상을 입고 나오는 경우는 이제는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즘 싸이파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 기술’의 절반 정도는 실제로 거의 상용화 단계에 이른 것들이 많다. 예컨대 <엘리시움 Elysium>(Neill Blomkamp, 2013)에서 맥스(맷 데이먼)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방사능 처리실에 갇히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이것은 흔히 일어나는 산업 재해의 다소 집약적인 버전에 불과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엑소스켈레톤(exoskeleton)을 장착한다. 이 엑소스켈레톤이라는 것은 일종의 입을 수 있는 로봇으로, 아직 널리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군인들의 전투력을 높이거나 보다 실용적으로는 같은 동작을 반복해 수행해야 하는 육체 노동자나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물론 영화에서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맥스에게 이것을 장착시킨다). 다소 상상해내기 쉬운 기술이 등장하는 대신 이런 영화들은 이런 기술들을 완결되고 세밀하게 보여주는 데에 굉장한 노력을 들이는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일종의 유행을 따라가는 듯한데, 나의 제한적인 관람폭에도 불구하고 폴리 사운드의 질감 같은 것은 거의 매년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려내는 기술의 비주얼을 가장 멋지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싸이파이 영화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싸이파이 영화는 왜 그토록 표면, 소도구, 특수효과에 집중하는 것인가? 훌륭한 전자 애니메이션 기술이 사용됐다는 것이 곧 그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요즘의 액션이 포함된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전자 애니메이션으로 (문자 그대로) 채워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헐리우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영화의 위기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우수한 전자 애니메이션은 (<매드 맥스>에서처럼)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면 구현이 불가능한 화면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데다가 많은 면에서 더욱 효율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훌륭한 전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일이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일과 같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즉, 위 문단의 질문—이 영화들은 왜 그렇게도 표면에 집중하는가?—을 왜 헐리우드 영화들은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훌륭한 전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가라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떤 것일까? 내가 최근에 본 몇 편의 영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영화들이 모두 끔찍한 영화들이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매드 맥스>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고 심지어 보는 동안 굉장히 재밌기까지 했지만 결국 아무런 감흥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이 이내 밝혀졌다.실은 이것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매드 맥스>를 본 다음 날 본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 The Hunger Games>(Gary Ross, 2012)는 캣니스(제니퍼 로렌스)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너무 지루하고 이런저런 문제 투성이여서 절반도 보지 못했을 영화다. 이 두 영화들보다 꽤 오래 전에 본 <종이 달 紙の月>(요시다 다이하치, 2014)이라는 영화는 정말이지 치를 떨면서 보았고 <한여름의 판타지아>(장건재, 2014)도 별다를 바 없었다. 특히 방금 언급한 이 두 영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설명할 것이다. 이 영화들을 보며 이 영화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일은 사실 퍽 재밌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한편으로 영화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어떻게 해야 영화가 훌륭해지는가란 질문보다는 이쪽이 훨씬 대답하기 간편할 것이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헝거 게임>은 굉장한 성공을 거둔 프랜차이즈 영화의 첫 편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와 제니퍼 로렌스가 출연한다는 등의 몇몇 정보 외에는 아무런 사전 지식을 가지지 않은 채로 보았다(나는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같은 판타지 영화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특히 이 영화가 촬영된 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무엇보다 헝거 게임에 참가하기 전까지와 그 게임이 시작된 뒤의 촬영 방식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헝거 게임이 시작되고 나면 영화에 나타나는 많은 쑈트들은 게임장 곳곳에 미리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는 것이라는 것을 게임 통제 센터에서 찍은 쑈트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쑈트들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만큼 너무나 안정적으로 인물들을 담아내서 도저히 미리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가 공간 이곳저곳을 마구잡이로 이동하는 인물을 찍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 외에도 이 영화는 세계관 설명에 놀라울 만큼 불친절한데, 내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생략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개연성을 빼앗아가는 일이었다. 세계관을 설명하는 고정된 카메라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지독한 핸드 헬드 촬영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고향인 제12구역에서 출발해 판엠의 수도 캐피톨로 가는 캣니스를 원샷으로 찍는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핸드 헬드 촬영을 일삼는데, 이 촬영은 무엇보다 머리를 너무 어지럽게 하고(나는 <클로버필드>를 볼 때도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다) 캣니스라는 인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나는 그보다는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고 어떤 시스템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것인지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라도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해야 했다.
<종이 달>과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묶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두 영화 모두 결정적으로 마음을 떠나게 한 하나의 쑈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 달>은 버블이 꺼져가던 1996년의 일본에서 리카(미야자와 리에)라는 사람이 허영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돈 씀씀이가 커지는 것과 동시에 외도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이 과정에는 맥락이나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외도 상대인 코타(이케마츠 소스케)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몇 번 마주치고, 그 뒤에 슬로 모션이 걸린 클로즈업 쑈트가 등장하는 동시에 앰비언스 사운드가 사라지고 도발적인 전자 음악이 그 자리를 채우는 식이다. 이러한 연출이 인물의 선택과 그 근거에 대해 무엇을 설명하는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촌스럽기까지하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이런 식—인물의 동기를 설명해주지 않고 결심과 행동만을 보여주는 식—으로 편집해 놓은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넘어가 보기로 했다. 이윽고 영화의 후반부가 되어 모든 것이 밝혀지고, 직장 선배와 독대한 자리에서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리카가 대답하는 장면이 등장했기에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곳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한껏 집중했다. 그런데 영화는 비겁하게도 리카가 첫 번째 외도를 하고 집에 돌아오던 아침으로 플래시백 하더니 손가락을 휘적이며 하늘에 떠 있던 달을 지우는 것을 리카의 시점 쑈트로 보여주었다. 그때 리카는 깨달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가짜라는 걸(이 대사를 치기 직전에 플래시백이 끝나고 우리는 그 방으로 돌아왔다). 모든 생략과 점프를 설명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이 쑈트를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해냈고(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당연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내 신뢰는 여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려 버렸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두 번째 파트의 후반부에서 유스케(이와세 료)가 혜정(김새벽)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이전까지 영화를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보고 있는 편이었다. 특히 고조 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몇몇 장면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흥미로웠으며, 홍상수의 영화와는 분명 어딘가가 다르긴 했다. 그런데 문제의 이 장면에서, 혜정은 유스케의 팔에 펜으로 연락처를 적어주고 이 틈을 타서 유스케는 혜정에게 키스한다. 김새벽에게 예고하지 않고 이 키스씬을 찍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다가 알게 됐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많지만 일단 제쳐두더라도 도대체 왜 이들은 전화기를 사용해 연락처를 남기지 않는가? 2010년대 중반에 그게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 연락처를 전해주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당연히 그런 방법을 택할 때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씬에서 그 이유라고는 ‘키스를 하기 위해서’ 밖에는 없어 보인다. 순전히 로맨스 영화의 어떤 항목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은 어떤 불필요한 행동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은 이 영화가 유지하려고 애쓰던 쑈트의 흐름, 담아내려고 애쓰던 고조 시의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물론 이것들에는 프로덕션 상의 실용적인 요인들이 더욱 크게 작용했겠지만). 따라서 나는 이 장면을 곱씹어 보며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기억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위에서 필요 이상으로 전자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에 대해 길게 늘어놓은 감이 있는데 하여간 앞의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나는 처음에는 예전의 내가 주로 보고 훌륭하다고 느낀 영화의 구석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돌연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된 순간에 대해 짧게 서술해 보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아무튼 이를 계기로 해서 최근에 본 몇 편의 영화들이 하나 같이 무너져내린 과정을 되새겨 보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리바이어던 Leviathan>(Lucien Castaing-Taylor·Verena Paravel, 2012)처럼 마법 같은 순간들을 느끼게 해준 영화들이 있고 그것들을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되돌아 보면 예전만큼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상한 현상은 그냥 내가 예전에는 별 희한한 영화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도 그저 넘어갈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찌 됐건 간에 영화는 ‘내가’ 보는 것이고 그런 영화들을 좋아했던 것조차 개인적인 영화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비교적 짧게 덧붙이려고 하는데, 바로 영화에서 어떤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떤 문제들이 새롭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것이다. 지난 학기에 세르주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이라는 글을 읽고 거기에 대해 수업을 들으면서,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의 극장에 ‘도덕’이라는 좌석이 새롭게 마련된 것이다. 비로소 나는 이 좌석에 앉아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들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이 좌석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했을 때 그 외에 믿을 만한 기준은 내게는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 외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내면의 판단에 기초한 도덕이, 내가 믿고 따르는 편인 어떤 이데올로기와 뒤섞이거나 충돌할 때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가령, <매드 맥스>가 페미니즘 영화인가 하는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어떤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가 되려면 가부장제에 찌든 지금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가, 페미니즘적인 의미에서 이상화된 사회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회가 그렇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내가 내리는 어떤 판단이 온전히 나의 의지와 도덕적 토대에 기초한 것인지, 내가 믿는 이데올로기의 하나의 발현으로 튀어나오는 것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때에 나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무기한 보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불균질한 영화를 애써 평평하게 만들고, 그러므로 어떤 영화를 축소시키거나 그 영화에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는 이미 내 의식의 일부이며 곧 나의 일부이며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비평을 스스로 검열하고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두 번째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알면서도 그러한 비평을 해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가(그것을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 사이에서 사실상 길을 좀 잃은 상태다.
당장 여기에 대해서 고민하자면 밑도 끝도 없는, 그것과 별 관계도 없어 보이는 고민들이 이어진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것으로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인가? 요즘 넷플릭스에서는 소비자들의 시청 패턴을 분석해서 자기들이 제작하는 드라마 스크립트 쓰는 일을 반쯤 자동화했다던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 영화가 더 이상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 제작에 찾아온 많은 변화들은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발로라고 보아도 될텐데 지젝을 좀 읽어 보아야 하나? VR(Virtual Reality) 기기가 상용화되면 영화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때에는 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정표가 되어 줄 만한 어떤 계기나 영화들이 필요할 것 같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아직 내가 보지 않은 영화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