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속이려 들지 않는 예술가가 미술관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대림미술관에서 열린 «트로이카: 소리, 빛, 시간-감성을 깨우는 놀라운 상상Persistent Illusions»(이하 «트로이카전»)에 다녀왔다. 관람객이 굉장히 많았다(특히 커플이 많았다).

트로이카Troika는 독일인인 코니 프리어Conny Freyer, 에바 루키Eva Rucki와 프랑스인인 세바스티앵 노엘Sebastien Noel 3인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그룹이다. 참고로 트로이카тройка는 원래는 삼두마차를 뜻하는 러시아어 단어다. 특이하게도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대체로 하나의 개념에 착상하여 만들어진 작품들을 만든다.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는 과학 기술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낸다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들이 단지 미술계의 경향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작품들을 자신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발빠르게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오늘날 과학과 예술을 융합한다고들 주장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아티스트/그룹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생각된다. 길게 얘기를 할 만한 작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전시를 다 보고 답답해진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내가 본 일이 년간의 대림미술관의 전시 기획은 누군가와 전시를 보러 오기 위해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기획의 특징은 (i) 적당히 세련된 작가의 전시여야 하며(국내에 충분한 인지도가 있다면 더욱 좋다), (ii) 어느 정도 지성과 감수성을 자극하면서도, (iii)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쯤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전시exhibition라기보다는 쇼show 내지는 디스플레이display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전에 대림미술관에서 라이언 맥긴리전을 보고 나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적이 있다.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원칙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무엇보다 가장 나빴던 부분은, 자신들의 작품들(그나마도 별로였다)을 너무 명료하게 설명하려 든 점이다. 그것은 미술관의 만행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감각에 눈뜨게 한다’는 매혹적인 카피로 홍보를 했지만 실상 «트로이카전»의 내용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모든 작품 옆에는 (그렇게 풍부하다고 할 수도 없는) 그것들의 함축들이 친절하고 간명한 문장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 공간에서 관람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작품을 보고 ‘신기하게 생겼다’라고 생각한 뒤, 설명을 읽고 ‘이런 뜻이었구나’라고 이해하는 것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지나치게 여백이 부재하며, 관람객은 수동적이다. 수용자로 하여금 새로운 감각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지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진정으로 오늘날 예술의 역할이라면 그 점에서 «트로이카전»은 오늘날 소위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사람들이 그들의 직무를 방기하면서도 얼마나 효과적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가령 ‹Light Drawings› 연작은 ‘전기 불꽃을 이용해 자연에 내재된 파괴성을 표현하였다’는 식의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예전에 리움미술관에서 보았던 히로시 스기모토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외형이 유사함은 물론 고압 전기를 평면에 방출시켜 그 흔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만들어진 원리 또한 유사하다. 그곳에서 분명 나는 «트로이카전»에서 느꼈던 것만큼의 저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거의 비슷한 두 작품을 감상하는 데 무엇이 그 체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걸까? 이 문제는 미술관이 작품을 포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인에는 우선 전혀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요소를 고려해야겠지만, 다소 애매모호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리움미술관 쪽이 좀더 관람객이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두었다고 하겠다. 사려깊다고 할지, 또는 큐레이팅의 내공의 차이라고 할지. 어쩌면—회의적인 생각이지만—그저 예술을 가지고 대중을 농락하는 데 있어 리움미술관이 대림미술관보다 훨씬 교묘하고 그럴 듯한 방식을 구사할 줄 아는 것뿐이라고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관람객이 자신의 지성을 이용해 작품들을 감상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데 더 능숙하달까.

Light Drawings #6, 2012,
 Electric charge on paper, 
©Troika


Lightning Fields Composed 012(Detail), 2009,
 Gelatin silver print, 149.2×716.3/2 sets,

Private Collection, ©Hiroshi Sugimoto

전시를 보고 나오며 이런 저런 고민에 휩싸였다. 어찌됐건, 대림미술관이 선보인 일련의 전시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 대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냥 고개를 돌려버려서는 안 될 것 같다. 3호선 열차가 미끄러져가는 동안 머릿속에서 여러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예술가가 자신의 존재와 지위를 인정받는 가장 주요하고 손쉬운, 어쩌면 유일한 방식은 결국 대중들이 그들의 작품을—특히 돈이라는 상징을 통해—널리 소비하는 것이다. 그점에서 분명 대림미술관은 잘 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결탁해 대중을 속이는 길 이외에 오늘날의 예술가가 그의 생존을 위해 택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길이 있을까? 오늘날 미술관 안에 참된(사람들을 속이려 들지 않는) 동시대 예술이 과연 존재하는가/할 수 있는가? 예술은 꼭 대중에게 이해받아야 하는가? 이런 고민 가운데 미술관과 갤러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또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와 그 학생의 역할은 무엇인가?

한동안 고민했지만 여전히 뚜렷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아마 꽤 오랫동안 고민해야 할 듯 싶다. 그저께 연세로에서 벌어진 «전환도시» 축제에서도 생각했다. 결국 예술/예술가와 그것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자립을 위해 거리로 나와야 하는 걸까. «트로이카전»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정신적 포만감을 신촌 길거리에서 느꼈다. 그러나 한편에서 굳이 이름붙이자면 마지못해 대중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들 중 몇몇은 여전히 길 건너편에서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