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 Citizen Kane>과 시네마의 다공성

시네마의 다공성


앙드레 고드로Andre Gaudreault는 The Kinematic Turn: Film in the Digital Era and its Ten Problems에서 다공성porosity이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다공성이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모양이나 그런 성질을 말한다. 고드로에 따르면 오늘날 미디어는 서로 교차하며, 상호의존적이다. 즉, 자기반영성과 상호의존성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미디어 시스템의 정체성은 서로가 서로의 미디엄이 되며 점점 혼란스럽고 구분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이제 하나의 미디엄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상실한다. 그것들은 더 이상 사유재산private property이나 민족 국가nation states가 아니게 되며, 고드로는 미디어의 이러한 경계의 불확실함의 결과로써 다공성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A ‘medium’ must thus be understood here in the sense of a base, an auxiliary to mediation, a mode of transmission. Among the consequences of this are an intense porosity, a loss of autonomy and singularity, in favour of a combinatorial multimedia quality and a generalized state of INTERMEDIALITY. (5, 7)

그런데 영화는 원래부터 다공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영화는 원래부터 다른 미디어를 교차시키는 기능 또는 함수function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시네마의 탄생(들) 이후 백여 년동안 그것의 존재론ontology을 찾으려는 시도가 있어왔지만 어느 것 하나 목적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했다. 가령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의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은 실상은 존재론이라 불리는 비존재론이며, 오히려 영화의 기능론에 가깝다. 그는 영화를 일컬어 영토 없는 예술이라 표현했다.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공허한지 생각해보면, 사실 영화는 애초부터 ‘영화적’이라는 것을 간직해본 적조차 없는 것 같다.

<시민 케인>


오손 웰즈Orson Welles의 <시민 케인 Citizen Kane>은 언뜻 평범한 전기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가 대체로 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ter Kane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묘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어떤 인물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는 전형적인 전기 영화는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단지 그의 삶이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보여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영화의 첫머리에서 찰스 케인이 죽음을 맞는 장면은 그가 (어디까지나 허구 속에서이긴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로서 스스로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보여지는 유일한 순간이다. 대신 그의 삶의 앞선 부분들은 케인 본인이 아닌 타인의 시각에 의해 (주로 플래시백을 통해) 재구성된다. 즉, 영화가 제시하는 케인의 삶의 여러 조각들—이 조각들이 마치 지그소 퍼즐의 그것들과 같다는 점은 영화가 끝나갈 무렵 톰슨의 의미심장한 대사에서 뚜렷이 제시된다—중 그가 죽는 장면을 제외한 모든 부분들은 일종의 집합 기호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에 보여지는 (케인의 부고를 전하며 그의 삶을 조명하는) 뉴스릴과 이후 톰슨이 찾아다니는 케인의 지인들이 각자 기억해내는 케인의 삶의 모습은 동일할 수 없다. 각각의 집합 기호들이 그들이 둘러싼 찰스 케인의 삶의 일부분을 서로 다른 형용사들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톰슨과 그 동료들은 지그소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로즈버드—까지 찾아내 케인의 삶이라는 퍼즐을 완성하고 싶은 욕망을 공공연히 드러내지만, 그들은 끝끝내 그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로즈버드가 퍼즐의 유일한 잃어버린 한 조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그렇게 믿을 따름이지 실제로는 ‘잃어버린 한 조각’이 아니며, ‘환상 속의 아이덴티티’에 가깝다. 케인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케인이 죽음을 맞이하며 그 단어를 말할 때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 지그소 퍼즐은 완성되지 못한 채(그리고 결코 완성되지도 못할 것이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다.

또한 케인이라는 인물은 스스로 시네마-기능cinema-function을 구현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케인이라는 인물은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미국의 미디어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를 모델로 하고 있다. 동시에 그 이미지는 오손 웰즈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 인물이 한 사람의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스크린에 비치는 찰스 케인의 이미지는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인물의—물리적으로는 오손 웰즈의 상이며, 서사적으로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캐릭터로서 찰스 포스터 케인의—이미지는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여러 미디어[인물]들의 교차를 매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즉, 찰스 케인의 이미지가 오늘날 시네마의 기능(으로 생각되는 것)을 적확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민 케인>이 그리는 케인의 삶은 어쩌면 은연중에 시네마의 다공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미디어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져가는 시대에, 신문이라는 미디움을 지배하던 찰스 케인[미디움]이 죽음을 맞이한다. 죽은 자[미디움]의 삶은 그 스스로가 아닌 타자[미디움]에 의해 정의되고, 그렇게 재구성된 삶에는 수많은 채워질 수 있는 구멍들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