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지 못한 것에 향수를 느낄 때가 있다. 장덕의 음악을 들을 때가 그렇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스물여덟 살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1990년의 일이며, 나는 그때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달쯤 전의 나는 언제나처럼 유튜브를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장덕의 음악을 처음 발견했는데, 그녀가 요절한 음악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이 복잡했다. 과거의 젊은 죽음이 현재의 젊은이에게 가져다주는 특별한 감흥이라고나 할까. 정말이지 그것은 향수에 가깝다. 안타까움이라는 단어로 봉합해버리기엔 너무 침착하고, 과거의 역사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유명한 누군가의 갑작스런 죽음은 역사의 지층에 큰 굴곡을 남긴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흔적으로서 과거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힘을 보탠다. 특히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젊은 예술가의 요절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의 가장 효과적인 증명이 아니던가. 역설적으로 장덕의 삶은 갑작스럽게 중단됨으로써 신화로 남게 되었다. 각종 매체가(나의 경우에는 유튜브) 그 신화의 존속과 재구성에 봉사하고, 나는 이들을 통해 장덕의 삶이 존재했음을, 또 그녀가 살아냈던 시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과거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나의 기억 너머에 있는 시간이 존재함을 알 때, 오히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그런 게 존재한다면)보다 매력적이다. 그것은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더욱 품귀하며, 예측 가능하기에 더욱 안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하여, 그것은 향수로 남는다.
오늘도 명성 있는 음악가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의 음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를 마왕이라 부르며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슬픔에 빠졌다. 어떤 이들은 비교적 침착한 태도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추모의 대열에 동참하고, 또다른 이들은 생전에 찾아 듣지도 않던 그의 음악을 타임라인에 공유하며 사실은 자신도 이 음악가를 좋아할 만큼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려고 애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나와 같은 부류의 비겁한 사람들이 침묵하고있다. 어찌됐건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매체들은 그들이 늘 그래왔듯 요며칠간 한 사람의 죽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소비할 예정이다. 그리고 또한 그는 기억될 것이다. 가령, 그의 음악을 담고 있는 수많은 개별적인 유튜브 비디오들 각각은 그의 죽음의 파편들이 덧입혀진 버전으로 재생산되며 (장덕의 음악들이 그랬듯이) 후대의 발견을 기다릴 것이다.
내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밤새 자신의 눈과 귀를 혹사시키는 동안 컴컴했던 방은 저절로 밝아졌고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 맙소사, 오늘도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이미 인구가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많아진 요즘 불행히도 인간들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점에서, '살아간다'를 '죽어간다'로 바꾸어도 대부분의 문장이 완벽하게 성립한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어쩌면 인간들은 죽음 이후에도 기억되기 위해서 살아가는(죽어가는) 동안 그렇게 갖은 몸부림을 쳐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이래로 끊임없이 죽어가고(살아가고) 있다. 만일 보통의 인간에게도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략 정해져 있는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 것이다. 먼저 운명을 다한 자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