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방패로 만들어진 장벽에 막혀서 오가지 못하는 걸 미디어에서 숱하게 봤지만 막상 눈앞에서 맞닥뜨리니 생경했다. 국가state라는 괴물이 벌이는 연극.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왜? 그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니까. 그곳에서는 우리들 또한 배우가 되어야 했다. 괴물에게 어떤 대항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사람들이 우리가 맡은 역할이었다. 나는 근처 식당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거기 경찰서죠? 여기 길을 가는데 경찰이 길을 막아요." 안타깝게도 경찰은 경찰으로부터의 위험에서 시민을 구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우릴 막아선 자들은 이 안이 위험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래서 그 위험한 것이 무엇인지는 정작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다른 몇몇 젊은이들 또한 이 장벽을 넘으려 시도하다가 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즐겁다는 듯 재잘거렸다. 이따금씩 큰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의미없는 대치를 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몇몇 어른들이 우리의 길을 걸을 자유, 목적지를 밝히지 않을 자유, 화를 낼 자유를 박탈했고 우리를 출신 고등학교와 성별로 재단했다. 한 경찰 아저씨는 담배를 피우는 여자애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너네 만한 딸이 있다고. 우리 중 몇몇은 당신 딸도 담배를 피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는 가려던 곳에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기 위해 경찰들이 포위를 잠깐 풀고 길을 텄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패배였다. 경찰들 몇몇이 우리가 버스를 타는 것을 보기 위해 버스 정류장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또래였지만 묵묵히 상관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일은 국가의 작동 방식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일종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후 광화문 광장은 또 한 번 패배의 광장이 되었다. 흔히 패배자 집단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광장을 점령했다. 그들을 무시하던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나는 인제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상대와의—그것이 국가이든, 민중의 뒤틀린 그림자이든—싸움에서 끝없이 질 것이다. 아주 큰 슬픔과 무기력함이 우릴 덮칠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패자로서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패배를 슬퍼하고 무력감을 기록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비관주의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패배자의 전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계속해서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의 이야기이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패자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오늘날 패배의 기록들이 훗날 패배자들의 휘발을 막아주리라 믿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