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24

이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건
무뎌지지 않으려는 마음

20160722

수박은 안에서부터 익는 걸까요
우리는 바닥에 둘러 앉아
김정미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고 있어요
내일은 다같이 밭에 갈 거예요
경운기가 멈출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웃을 것입니다

제주도에서

엄마
오늘까지만 사람을 미워할게요
내일부터는 친구를 그리워 할 거예요

영상문화연구 2016

 
 
 
 
 
 
 
 




노이즈


 

 

이문동, 여의도


 

계획 대로 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지난 2월 12일부터 14일까지 인디스페이스(서울극장)에서 열린 제12회 방송영상과 졸업영화제에서 한미진 연출의 <LIFE PLAN 101>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계획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이걸 강조하기 위해 똑같은 말을 두세 번 정도 반복해서 써도 좋을 것이다. 계획한 것은 절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획은 항상 어느 만큼은 빗나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좌절감을 주는 것’을 계획이란 단어의 정의로 채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계획을 세우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모든 일을 계획하고 일이 그대로 풀리지 않을 때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다. 계획—미래를 먼저 한 번 헤아려 보는 일이야말로 인류가 지금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다. 어차피 우리는 미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다가오는 미래의 공포에 계획이라는 임시방편으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모든 것이 계획에 들어맞지는 않았거나, 어떤 예상치 못한 변수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이 계획한 대로 안 굴러가도 언제나 어느 정도는 괜찮다. 원래 그런 거니까.

<LIFE PLAN 101>에서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인터뷰이들에게 화이트보드에 꿈을 그려 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딱히 무너가를 그리지 못하고 헤맨다. 그러면 현실적인 계획을 그려 보라고 한다. 그제서야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웰시 코기를 키운다든가, 자동차를 산다든가, 애들은 무조건 학원엘 보내야지, 집을 사는 일은 자살 행위와 다름 없죠, 어쨌든 목표는 헬조선을 탈출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이 계획들이 세워지는 단계에서부터 벌써 실패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자식을 학원에 밀어 넣어야 하고, 차를 살 돈 같은 건 없을 거란 걸 깨닫고, 그래도 어쩌면 반려견 한 마리 정도는 지탱하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꿈은 그려 볼 수조차 없고, 계획은 세우는 동시에 포기한다. 이들이 모두 제1세계 출신이라는 점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이 사람들이 무리한 희망 사항을 그려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꿈과 현실로 표현하라고 하면, 이 상황은 악몽쯤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긴, 실은 아직도 21세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2016년의 한국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든 이미 여긴 미래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됐다. 너무 당연한 것을 바라기에도 벅찬 이곳에서, 우린 (최신의 유행을 따라) 나라를 탓하든 (다소 구식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탓하든 간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건 그냥 5분 짜리 유튜브 클립이다. 대개는 그냥 심심풀이로 보는. 게다가 우린 이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건네거나 따끔한 충고—이건 이대로도 너무 끔찍하다—조차 할 수 없다. 그런다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누구도 이 사람들에게 ‘왜 벌써부터 포기하느냐’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아직 많다는 게 이 세상의 수많은 문제 중 하나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인마 다 너 잘 되라고’ 운운하며 예의라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 하여간 이걸 보는 사람이 그나마 안전하게 할 수 있는 건 웃긴 장면에서 몇 번 웃는 것뿐이다.

여기서 무력감을 딛고 일어나려면 이런 질문부터 던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꿈과 현실 사이에, 계획의 자리는 어디에 있나? 어쩌면 그건 아무 데도 없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영상 안에서는 그렇다. 꿈은 이미 산산조각났고,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그 사이에는 도무지 계획이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가 본 건 개론(101)이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어쩌면 몇 개의 강의가 우리를 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강의가 잃어버린 계획의 자리를 찾아내는 일에 관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런 계획 없는 무방비 상태로 어쨌든 오기는 할 미래를 맞긴 싫으니까. 그 계획이 좀 엇나갈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매일 매일을 원망하며 살 것이다.

부산에 내려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따가 아침에는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에 갈 것이다. 일주일 동안 언제나 괴로웠다. 매일 적어도 한 번씩은 부친으로 인한 괴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내가 함께 잘 지낼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사실 그건 모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아무튼 내게 피해를 덜 끼친다고 해야겠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고,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지만, 하여간 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어떻게든 여길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드는 것이다. 얼른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좀 덜 풍족한 집안이 되더라도 아예 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턴 아무런 쓸모 없는 상상이다. 내 부모는 아직도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싶어하고, 내 삶을 통제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의식적으로 영향 정도는 끼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게 가장 불쾌하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하며 살고 있는 이상, 그걸 피할 수도 없으니까.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면 나는 훨씬 더 자율적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때는 그게 좋은 걸 잘 몰랐을 것 같지만.

오늘 서울에 가면, 한 달 반 정도 있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내 미래를 꾸리는 데에 부모가 끼어들어 뭔가 바꿔놓는다는 게 불만족스럽다. 나라면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텐데. 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끔찍하다.

적어도 2월 중순까지는 바쁘게 살아갈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어제는 밤새 일했다. 그전에 일을 했으면 좋았을 시간, 그러니까 해가 아직 떠있을 시간까진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케이블 방송국 중에 채널 J라는 데가 있는데 주로 일본 방송을 들여와 보여 주는 곳이다. 거기서 틀어주는 일본 드라마 같은 걸 한참 봤다. <진>이라고, 어쩌다가 에도 시대로 타임슬립한 천재 외과의사의 이야기를 즐겁게 봤다. <노부나가 콘체르토>라는 또 다른 타임슬립 사극의 예고편도 봤다. 타임슬립 사극의 매력이란 뭘까? 아무튼 주인공이 에도 시대에 주위 사람들 도움을 받아 링거 주사를 만들어 내고 하는 걸 보고 있으니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타임슬립을 해서 조선시대에 가고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얼른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고 싶겠지. 굳이 그런 걸 체험하고 싶지 않다.

두 시쯤에 씻었더니 잠이 다 깨서, 일하기 시작했다. "우린 그냥 앉아서 일을 한다"는 문장을 종종 떠올린다. 나는 앉는 시간대가 많이 늦을 뿐이지. 요즘엔 학과 논문집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돈을 쥐꼬리만큼 준다고 해서 인디자인 연습 삼아 부담없이 하려고 한다. 대충 양식은 다 만들었고, 거기에 내용만 채워 넣으면 될 듯하다. 말은 간단하지만 산더미 같은 일일 것이다. 이번 해엔 유난히 논문이 많아서. 작년 논문집엔 네 편이 실렸는데 올해 논문집에 들어갈 논문은 열 편이다. 근데 한해에 입학하는 사람이 대충 열 명 정도는 되니까 졸업논문 수가 그렇게 많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대체로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처럼 꼬박꼬박 나가질 않으니까. 근데 항상 졸업생 수가 입학생 수보다 많으면 그 사이에는 다들 어디에 가 있는 거지?

아무튼 정신을 차렸더니 아침이 되어 버렸다. 오전 중에 인터넷 엔지니어(기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항상 이상한 기분이 든다)가 방문할 때까지 깨어 있었다. 열 시간쯤 자고 밤에 일어났다. 며칠 만에 씻었더니 깨끗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몇 사람에게 송금을 하고, 밀린 <어드벤처 타임> 시즌 7 에피소드들을 챙겨 보면서 편의점에서 사온 김밥을 먹었다.

이번 주까지 다른 과 졸업영화제에 글을 하나 쓰기로 했다. 적어도 어딘가에 공개될 것을 만들어내는 일은 미루거나 늦추지 않아야 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글이랑 모아서 출판물 하나를 제작해야 하고, 그 일정이 논문집 편집과도 겹치니 앞으로 몇 주 동안은 꽤 바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

어젯밤 꿈에서 마신 딸기우유 향이 코끝을 떠나지 않아서 딸기우유를 사 마시고 있다. 딸기우유를 자주 마시지는 않는데, 가끔 딸기우유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때가 있지. 딸기우유를 마시면 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언제나 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한 번은 씨리얼을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먹어 보고 싶어서 기어이 씨리얼에 딸기를 넣어 먹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맛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딸기우유에는 수사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딸기 향만 들었다. 그냥 딸기(과일)를 사서 먹기엔 너무 가난한 사람이 됐고, 본가에 내려가거나 하지 않는 이상 대개는 합성된 향으로만 그걸 소비할 수 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마음이 너무 괴로울 때는 쏘카에서 차를 빌려다 운전을 하곤 한다. 나는 내 소유의 자동차가 없기 때문에, 몇 시간 정도 운전을 하려면 현재로서는 쏘카가 최선의 선택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건 나중에 더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 같고, 아무튼 운전을 할 때 제일 좋은 점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평소처럼 방에 가만히,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나를 잡아먹는 무서운 생각. 기분. 평소 생활이 그런 게 되었다는 건 확실히 슬픈 일이다. 누가 나를 구해줄까.
 
하여간 쏘카가 그렇게 저렴하진 않다. 괜찮은 선택이긴 하지만, 택시비 정도는 든다고 생각해야지. 그러니까 기분이 나쁠 때마다 타고 나갈 수는 없단 말이다. 나한테는 딸기 사 먹을 돈도 없는데. 이젠 내가 어쩌다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엔 분명히 내가 왜 우울할까 생각해 보면 뭔가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많이 걱정하지 않았다. 이젠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라 그런 걸 잘 모르겠다. 늦게 일어나서 하루가 다 지나가 버렸고, 그게 억울해서 잠을 못 잔다. 그럼 늦게 잠들고, 또 늦게 일어나겠지.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닌데.
 
가난하고, 정신은 밑천이 떨어졌고. 최악의 궁지에 몰렸다. 이대로 계속 망가지고 싶지 않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른다. 하여간 지금 이랬던 걸 나중에 잊어버리지는 않으려고.

전국노래자랑



작년에 시작했던 걸 드디어 끝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최악의 순간이 찾아왔고… 이 노래는 너무 오래 방치했었기 때문에, 다시 꺼냈을 때 이걸 무슨 생각과 감정으로 진행하고 있었는지가 기억나질 않았다. 되어 있던 부분을 많이 건드리진 않았지만,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그러니까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의 기분 같은 건 (아마) 휘발된 상태다.

나의 상태

이걸로 현재는 과거가 됐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과 있으면 더불어 행복해질 것 같은데 막상 그렇게 되면 거꾸로 간다. 숨을 쉴수록 속이 꼬인다. 과거는 점점 더 불행해지고.

나는 밑천이 다 떨어졌다. 그걸 깨닫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무엇부터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을지.

절망 속에서 토론하기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제257호에 쓴 칼럼이다.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정도로 단순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르고 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생겨나는 문제들을 계속해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의 집합을 삶이라고 기꺼이 부를 만하며, 어떤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 두고 싶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 거기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하고, 그 말을 듣고 수긍하거나 반론을 던질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 토론에서 이것이 문제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날 것이고, 이것이 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지면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변화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토론이야말로 모든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첫 번째로 언급해야 하는 것이다. 토론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토론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토론이 주로 이루어지는 공간을 공론장이라고 이름 붙여도 괜찮을 것이다. 특히 비교적 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공론장 없이 의미 있는 토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공론장의 존재는 토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어떤 사회에 제대로 된 공론장이 없고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곳에 있는 문제들은 쉽게 발견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내는 이곳은 어떨까?

지난 14일 새벽 12시 30분부터 두 시간여 동안 제이티비씨(JTBC)에서 방영된 <JTBC 밤샘토론>의 주제는 ‘국정화 블랙홀에 빠진 대한민국’이었다. 한국 공중파와 종합편성 방송사들 중에서는 그나마 JTBC가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매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에는 사회자가 한 명 있고 네 명의 논객이 청팀과 홍팀으로 나뉘어졌다. 청팀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교수, 홍팀은 조전혁 전 새누리당 의원과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각각 구성됐다. 전 정치인과 역사 전문가로 어느 정도 짝은 맞춘 셈이다. 이 논객들 배경을 살펴 보는 것이 재밌는데, 유시민 전 장관이야 익히 알려져 있듯 진보 진영에서 활동했던 정치인이고, 이신철 교수는 현대사를 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이면서 역사교과서에 대한 토론회에 자주 나타나는 논객이기도 하다. 홍팀의 조전혁 전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뉴라이트 계열 교육 운동과 전교조 반대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권희영 교수는 ‘그’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대표집필한 사람이다.

이만큼 알고 나서도 이 토론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하기란 힘들었다. 그럼에도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었기 때문에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는데, 그 궁금한 점이란 △홍팀 논객은 반대 의견을 가진 상대를 바로 앞에 두고 대화해야 하는 곳에서 어떤 자세를 보일 것인가 △홍팀이 토론에 임하는 자세에 청팀 논객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날 유 전 장관과 이 교수는 가능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는 듯했다. 반면 조 전 의원과 권 교수에게서 비슷한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토론은 가령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권 교수는 토론 첫머리에서 지난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한 데에 대해 “일찍이 일제시대에 박은식 선생께서는 국혼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마찬가지로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도 ‘조선의 얼’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얼, 즉, 혼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말씀하셨다”며 “바로 그 중요성을 대통령께서 충분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와 같은 발언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호했다. 이어서는 “오늘 토론의 제목이 ‘국정화 블랙홀’인 것은 잘못된 은유가 아니냐. 블랙홀은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서 부서지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이번 국정화 문제를 계기로 해서 벌어진 다양한 논전들은 블랙홀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원석이 다듬어지는 과정이다”라고 주장하며 “이것은 가치투쟁”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이신철 교수가 “박은식·신채호 선생이 이야기했던 민족혼, 국혼이라는 것하고 지금 대통령께서 이야기하고 있는 국민 혼이라는 것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며 반론을 시작했다. 그는 “국정화를 지지하는 분들은 역사학계의 90%를 좌파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대해 실상 우리 역사학계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계 전반에 대해 좌파, 종북이란 말까지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생각된다”고 비판했다. 권희영 교수의 발언에 대응하는 피드백을 제공한 것이다. 이 교수는 또 ‘박근혜의 입’이라고 불리어 온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이 지난 달 26일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는 데 반대하는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고 발언한 사실을 언급하며 “대통령의 이야기[와 종합하면] 국정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국민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국민 혼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조전혁 전 의원은 곧바로 이어지는 반론 기회에서 “사실 저도 국정화를 반대합니다”라고 말을 떼더니 “국정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까지 와 있다는 것이 이 문제의 슬픈 현실”이라며, 잠깐 전에 이 교수가 ‘매도’라며 논파한 바 있는 논리를 같은 뜻의 다른 문장으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유 전 장관을 향해 “통합진보당 들어가서 소위 주사파로부터 공격을 받으며 고생 좀 하시지 않으셨느냐”며 “지금 교과서 문제가 마치 그런 지경에 처해 있다”고 평한 것이다. 조 전 의원은 이어 “역사학계가 일종의 강력한 카르텔을 만들어서 독점 구조 하에서 거의 똑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민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식의 통일도 좋다’ 이런 식의 의심까지 들게 하는 교과서 편찬 경향을 가져왔다”며 “일곱 종의 교과서를 보면 한 가지 교과서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국정화를 선택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고뇌에 찬 선택을 내린 것”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반박에 대해 재반박을 한 것이 아니라 반박 당한 논지를 근거 삼아 새로운 주장을 펼친 것이다.

홍팀 논객들의 말하기는 토론 내내 이런 방식이었다. 그 방식이란 청팀의 주장이나 반박에 대해서 마치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대신 기존의 이미 논파 당한 주장들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고, 지속적으로 주어진 논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다른 틀을 내세우곤 했다. 청팀 논객들은 주로 홍팀 쪽 주장을 하나씩 돌파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펼쳐나가려는 방법을 택했는데, 무언가 반박을 해도 재반박이 없으니 전진할 도리가 없고 반대편에서 들고 나오는 기괴한 가치판단의 기준들을 해체하는 데에도 입이 모자라니 그저 실없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끝 부분에 가서는 사회자가 제시한 논제와는 달리 ‘무엇이 좌고 무엇이 우인가’ ‘좌우 구분의 기준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가’ 정도 되는 주제라고 보아야 마땅한 토론이 이어졌고 방송은 방청객 질문을 받으며 형식적으로 마무리됐다. 마지막에 이신철 교수가 ‘오늘의 올빼미 논객’으로 선정돼 올빼미 쿠션을 타 갔고 다음 날 유시민 전 장관의 몇몇 발언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청팀에게 이번 토론은 사실상 실패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JTBC 밤샘토론>이 끝난 뒤 자고 일어나서 이날 저녁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에 나가 보려고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내가 시내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는데 종각역이나 광화문역은 지나다닐 수가 없는 상태라는 소식을 듣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 서쪽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지상으로 올라왔더니 십만여 명이 참여하는 집회가 열리는 도심 부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평소와 다른 점이 없는 모습이어서 조금 놀랐다. 종로1가부터 도로에 차가 다니지 않았고 집회 참가자들을 목격했다. 종각역 즈음 가서 기침이 난다 싶더라니 차벽 앞에서 최루액을 맞아가며 시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 들어가 보고 싶어서 차벽을 따라 안국 쪽으로 갔다가, 인사동을 거쳐 다시 종각으로 왔다가 청계천을 따라 코리아나호텔이 있는 광장 남쪽에 왔다. 그러나 광장에 들어가 있다는 친구들은 연락이 잘 되질 않았고 광장 남쪽에서도 광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틈새는 보이지 않아, 당분간은 하염없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관찰하는 수밖에 없었다.

폴리스라인과 그위에 올라서서 채증을 하고 있는 경찰들 너머로 빌딩 전광판에 여느 때처럼 광고가 재생되고 있는 풍경은, 확실히 이상한 것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느꼈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묘사하지 못하겠다. 광장에 있던 친구들 몇이 어떻게인지 바깥으로 빠져 나와서 합류할 수 있었는데, 그 뒤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폭력 경찰 물러가라’ 따위의 구호를 연신 외치며 최루액을 담뿍 맞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 몸을 씻었다. 그때 우리가 외쳤던 구호들은 ‘국정화 교과서 반대한다’ ‘노동 개악 분쇄하자’ 등을 비롯해 대부분의 현안에 대한 것이었다.

막상 기억에 남는 것은 언젠가 연단에 선 사람이 “우리는 저들(청와대에 있는 분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었던 순간이다. 하여간 여기서 우리가 아무리 집회를 해도 우리가 외치는 말들이 그 말들을 좀 들었으면 하는 자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되고 있다는 점은 그때쯤에는 분명히 알아챘던 것 같다.

집회 현장은 (최루액 때문에) 뜨거웠지만 폴리스라인 외곽에서 세네 구역만 벗어나면 집회가 열리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고, 무슨 내용에 관해 어떤 내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는 더욱 어려웠다. 사실 정부가 집회에 이런 식으로 대응하게 된 지는 꽤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일간지들은 온통 강경 진압이었냐 폭력 시위였냐에 대한 보도로만 가득 찼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거기에 모였던 것인지는 지금쯤이면 많이들 잊혀졌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저쪽에서는 우리 쪽 사람들 말을 귀담아 듣지 않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우린 청팀이고 상대는 홍팀인 셈이다.

상대방이 이렇게 모든 힘을 다해 내 말을 안 듣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무슨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더욱 힘 빠지게 하는 점은 여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일은 시민으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수치를 모르는 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이것은 지독하게 앞이 깜깜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희망이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단지 구호로 외치기에는 너무 엉성해 보이는 이 단어의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우선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예컨대 저기에 대나무숲이라는 곳이 있다. 나는 처음에 이 공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조금 비웃기까지 하며 지나쳤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나무숲에서는 얼마 전부터 페미니즘을 놓고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정도의 열띤 토론이 벌어져 왔다. 물론 이 토론이 전부 잘 정제된 형태였다고 말할 수는 없고, 관리자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보여주는 존경 받아 마땅한 노력에 어느 정도 의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동시에 누군가가 대나무숲에서 말하거나 들으면서 분노하거나 상처 입는 경험들도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듣고, 거기에 대한 반응들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확실히 기뻐할 만한 일이다. 나는 이것이 어떤 긴 토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대나무숲이 어떤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연히 대나무숲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공론장은 아니겠지만, 여기에는 최소한 희망이 있다. 우리 학교라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사회가 더 건강한 곳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비상식에 대처하기

밀린 빨래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잠들어 밤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요즘은 잠자는 일을 빼면, 언제 식사를 하고 일들을 처리하는지 지나고 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사실상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스쿼치 치러 체육쎈타에 가는 일은 가능하면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잠을 너무 많이 자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됐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조만간 신경정신과에 방문해 약을 처방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몇 주 전에 보건소에 잠깐 들렀을 때 했던 <우울증 자가 진단>에서는 정상이라고 나왔는데, 그사이 너무나 우울하고 아무런 일도 제대로 해내기 힘들며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으로 삶을 지속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뒤늦게 현대인이 되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는 기숙사에서 연락이 와서 휴학생은 기숙사에 입주해 있을 수 없다며 주말까지 방을 빼라고 했다. 관련 규정을 알고는 있었지만 행정적인 연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맘대로 단정한 채 안심하고 있었는데, 허를 찔렸다. 당장 짐은 어디에 두고 잠은 어디에서 자야 하는가. 이번 주 들어 세네 번째로 제발 문제들이 한 번에 하나씩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는 일을 롤플레잉 게임처럼 생각하면 편리할 때가 있는데 되려 퀘스트가 멋대로 불어나서 도저히 플레이할 마음이 안 들게 만드는 못 만든 게임이 되고 말았다. 가장 나쁜 점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에는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고, 그것은 퍽 다행이다. 최근에 겪었던 다른 일(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이 일이 내가 펴내고 있는 신문에 대한 것이라는 것 이상으로 이것을 자세히 묘사하기는 힘들다)은 정말이지 내 좁은 삶의 범위에서도 가장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반지성적인 것이었고, 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우리는 비상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나는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사람(어른)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손가락 한 마디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번 상대는 안타깝게도 이 전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우리의 대화는 실패(실패라는 단어로는 모자라다고 생각한다)로 끝났다.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 해결하기는 했지만, 이 어려운 주제는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우리는 비상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분야에 관해 나는 스스로를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자신있게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이야말로 그의 삶에 비상식적인 것이 나타날 때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당당하게 숨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여기에 대한 나의 입장은 (아직까지는) 이런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에 아주 작은 영향이라도 끼치기 위해 노력하자는 쪽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 힘이 드는 일이다.

신문으로 범위를 좁혀 문장을 다시 써 보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독자 집단 안에 비상식적인 인간들이 섞여 있다는 점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그리고 그 숫자는 우리가 어림잡던 것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우리 신문이야 드물게도 상업성이라는 단어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지만, 돈에 관해 걱정해야 하는 매체라면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돈에 관해 걱정해야 하는 매체들이 왜 그런 비상식적인 일들을 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쟁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여간 내가 알기로 그간 우리 신문은 특성상 독자층에 관한 고민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오진 않았는데, 발행부수 자체가 많지 않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문을 어떻게 만들어도 보는 사람들은 대충 정해져 있고 거기서 영향 받을 만한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일부 독자들의 비상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한 이유 또한 없다는 점이 새롭게 강조됐다. 왜냐하면 우리 신문은 몇몇 다른 매체처럼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독자들의 특성을 고려해 목표 대상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구성원이라는, 아주 명쾌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불명확한 독자 집단을 위해 만들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쓰는 방식, 알맞은 표기법, 지면 편집에 쓰이는 단의 개수, 인터넷 신문을 운영하는 방침을 포함해 모든 것을 갈아치우더라도 바뀌지 않을 한 가지는 우리 신문이 학교 신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학교 구성원, 그중에서도 특히 학생들을 위한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비상식적인 학생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스스로 상식적이며 나아가 문제의식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언제나 조국 문명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말장난이긴 하지만 진심이다). 그를 위해 첫 번째로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두 번째로 예의를 갖추기 위해 힘쓴다. 학교 신문이라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의무가 부과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상식적이라고 해서 그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상식적인 사람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보다 양적으로 더 가치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삶에 당장 감지되지는 않는 아주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그것이 남의 삶에 간섭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잘 정리된 이론적 규범이라기보다는, 이런 신문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도덕적 선언 정도라고 해석하면 좋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글을 쓰기 위해 메모 앱을 연 것은 아니었는데, 이제 이런 식의 글밖에는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도시가 스스로의 청결을 유지하는 기본 전략은 더러운 것들을 한 군데에 밀집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생활 방식은 지속적으로 쓰레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도록 구성돼 있다. 우리는 방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들을 쓰레기통에 모으고, 각자의 쓰레기통에서 나온 쓰레기들은 더 큰 쓰레기통에 모여 건물 밖으로 배출된다. 그것들은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매립지 같은, 일종의 굉장히 큰 쓰레기통으로 옮겨져 최종적인 운명을 맞이한다. 쓰레기통에는 주로 쓰레기 밖에 없으니 누구나 그것을 더럽다고 여기지만, 쓰레기통이 있기 때문에 나머지 공간이 쾌적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학교 석관동 캠퍼스에 있는 기숙사 천장관은 네 개의 복도가 중정을 둘러싼 모양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정사각형의 네 꼭짓점에는 계단이 있는데 원래는 계단마다 쓰레기통이 놓여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천장관 사무실에서는 쓰레기 분리배출을 한다며 모퉁이마다 있던 쓰레기통을 한 군데에 모아놓고 무단 투기를 하면 CCTV를 확인하겠다는 둥 무단 투기하는 관생들을 적발해 퇴관 조치 하겠다는 둥 하루에 세네 번씩 문자메시지를 보내댔다. 운이 나빠 반대편 방에 지내는 사람은 이제 단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복도 두 개를 따라 왔다갔다 해야 한다(건물을 한 바퀴 도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물 입구에 있던 재떨이도 있다 없기를 불규칙하게 반복하기 시작했다.

분리배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쓰레기를 재질에 따라 나누어 배출하는 것을 말한다. 쓰레기가 매립되는 양을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여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는 속도를 가능한 늦추고자 하는 것이 분리배출의 목적이다. 현재 서울시는 인천시, 경기도와 함께 1992년에 인천과 김포에 걸쳐 조성된 수도권 매립지를 이용하고 있는데 원래 수도권 매립지는 2016년을 끝으로 사용이 종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간 분리배출 비율이 높아지고 종량제 등이 효과를 보면서 쓰레기를 매립하는 양이 감소해 지난 6월 28일 3개 시•도는 수도권 매립지를 2025년까지 사용하는 데 합의했다. 특히 서울시는 이번 합의가 아니었다면 당장 쓰레기를 처리할 장소가 없어 쓰레기 대란을 맞을 뻔했다. 서울시가 지난 해 12월 “2017년까지 쓰레기 직매립 제로를 달성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분리배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분리배출을 더 효과적으로 시행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분리배출을 하려면, 쓰레기를 종류별로 모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더 많은 쓰레기통이 필요하다. 그러니 분리배출을 한다면서 쓰레기통을 더 많이 두지 않는 행정을 이해할 길이 별로 없다.

관생들이 각자의 방 등지에서 생겨난 쓰레기를 방 바깥에 있는 쓰레기통에 가져다 놓으면, 이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은 청소노동자의 몫이다. 청소노동자들은 주말에 일하지 않기 때문에 일요일만 되면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넘쳐나는 풍경을 예전에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천장관에서 쓰레기를 배출하는 방식에 관한 문제에서 먼저 논의되어야 했던 쟁점은, 분리배출을 하느냐 마느냐보다도 쓰레기통의 크기와 개수를 늘려야 할 것인가였다. 그리고 당연히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주말만 되면 쓰레기가 넘치는 건 못 본 체하면서 우리 기숙사에서는 분리배출을 아주 모범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며 뿌듯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꽤나 곤란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제는 쓰레기통이 한 군데에 모여있다. 쓰레기통이 가득 차면, 관생들은 보통 그걸 보고 자신들이 갖고 나온 쓰레기를 도로 가져가 고이 간직하기보다는 가능한 조심스럽게 그 위에다 자기 쓰레기를 쌓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지구의 다른 대부분의 장소와 마찬가지로 천장관에도 중력이라는 것이 항상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 쓰레기로 지은 탑들은 모조리 무너져 온 사방에 널브러진다. 한데 뒤섞인 쓰레기들을 정리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청소노동자의 일이다. 왜 이런 비효율적인 이중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구축하는가(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식의 분리배출은 분리배출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어떤 장소를 관리하는 일의 책임감이라는 개념과도 연결해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앞에서 얘기한 재떨이도 마찬가지다. 늘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은 있던 재떨이가 잠시 없어졌다고 해서 거기서 담배 피우는 일을 당장 멈추지는 않는다. 근처 기둥에 붙은 공지문을 읽어 보면 재떨이를 치운 까닭이 사람들이 재떨이에 쓰레기를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사람들이 재떨이에 다른 쓰레기를 버리는 것에 대해 재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재떨이 옆에 쓰레기통을 두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안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분리배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공간을 관리하는 단위에서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분리배출을 덜 귀찮게 할 수 있을지 최선을 다해 고민해야 한다. 천장관의 경우에 답은 간단하다: 쓰레기통을 더 많이 비치하라! 도리어 쓰레기통이 있는 장소를 줄인다는 건, 이들이 행정이라는 것의 목적을 어느 정도 오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일을 제대로 할 마음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뜻한다. 사람들이 아무 데나 쓰레기와 담배 꽁초를 버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곳곳에 쓰레기통과 재떨이를 마련해 둬야 한다. 각 사람이 선진적인 시민 의식을 갖추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다.

영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영화 비평 세미나 1> 첫 번째 과제


지난번 수업 시간, 방학을 통과하며 어떤 것이 바뀌었냐는 정성일 선생의 질문에 좀 머뭇거리다가 별로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난 학기의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결코 영화 비평에 특별한 흥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비평이 흥미롭고, 비평을 계속 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비평을 쭉 하게 된다면, 2015년 상반기가 중요한 계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쓰기 시작한 글의 처음 몇 부분은 항상 곤란하게 마련이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우선은 내가 어떤 영화를 보아 왔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무엇을 느꼈는지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생각이 정리된 뒤 글을 써내려가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데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써야 하는 분량은 적지 않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이 글의 주제는 ‘나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는가’보다는 ‘나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에서 무엇을 보게 됐는가’가 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싸이파이(Sci-fi) 영화 또는 싸이파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분류될 수도 있는 영화들을 재미있게 보아 왔다. 그러나 내가 결코 영화를 많이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총량은 그렇게 방대한 것은 아니다. 싸이파이 영화에 대한 내 선호는 기껏해야 중등교육 시절까지 접했던 많지 않은 동시대 영화들에 의해 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때 동시대란 전자 애니메이션 기술(computer-generated technique, CGI)이 본격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던 시기였다. 나의 동시대는 <죠스 Jaws>(Steven Spielberg, 1975)에서처럼 지금의 기준으로는 빈약한 상어 모형이 관객들에게 리얼한 공포를 가져다주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죠스>는 옛날 영화가 됐다. <괴물>(봉준호, 2006), <아바타 Avatar>(James Cameron, 2009) 같은 영화들이 한 편씩 개봉할 때마다 전자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영화의 화면은 점점 더 정교해져갔고 나는 거기에 큰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적어도 이런 류의 영화들을 볼 때에 나는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다(어차피 이야기는 다 똑같았으니까). 그보다는 영화의 표면이 중요했다. 이 영화는 얼마나 독특하고, 그러면서도 나름의 근거가 있어서 내적인 신빙성이 있는 비주얼을 내게 제공하는가? <클로버필드 Cloverfield>(Matt Reeves, 2008)라든가 <원티드 Wanted>(Timur Bekmambetov, 2008) 같은 영화들이 지금까지도 몇 번씩이나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로 기억에 남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클로버필드>에서는 뉴욕 시 시내가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괴물에 의해 파괴되는데, 영화는 이 침공을 피해 달아나는 우리의 주인공들이 들고 있는 캠코더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흔들리는 캠코더의 리얼함(인물이 정말로 이 캠코더를 들고 뛰고 있다!)은 영화에 사용된 특수 효과를 정말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촬영했을 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종류의 감각을 가져다준다. <원티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인들보다 심장 박동이 훨씬 빠르고 월등한 동체 시력과 순발력을 갖추고 있어서 총알을 가로 방향으로 휘게 쏠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전자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휘어져 나가는 총알의 모습은 꽤나 독창적이고 멋지다.

앞서도 말했듯 이런 영화들을 볼 때 나는 이 영화들의 다른 부분, 특히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클로버필드>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며, <원티드>를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가만으로 평가하자면 클리셰로 뒤덮인 재앙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디아틀로프 The Dyatlov Pass Incident>(Renny Harlin, 2013)나 <유로파 리포트 Europa Report>(Sebastián Cordero, 2013) 같은 영화도 재밌게 봤다.

전자 애니메이션은 점점 흔히 사용되기 시작해서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들에는 사실상 포스트 프로덕션의 필수적인 과정이 됐다. 당연히 옛날에는 싸이파이 영화의 전유물이던 전자 애니메이션은 대부분의 액션 영화와, 예전에는 특수 효과를 굳이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장르에 속하는 많은 영화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러스트 앤 본 De rouille et d’os>(Jacques Audiard, 2012)에서 스테파니의 잘린 다리를 표현하기 위해 그린 스크린 크로마 키(chroma key)를  응용해 사용한 예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이다(마리옹 꼬띠아르에게 무릎 아래까지 오는 녹색 스타킹을 신긴 채 촬영하고 나중에 무릎에 3D 모델링을 덧씌웠다). ‘컴퓨터로 그린’ 장면이 실제 우리가 보는 영화에서 얼마만큼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유튜브에서 ‘CGI Magic’이나 ‘Special Effects’ 등의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쏟아져나오는 영화 메이킹 영상들을 몇 편만 살펴봐도 실감할 수 있다. 그건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놀랍다. 이쯤 되면 영화를 애니메이션의 하위 범주로 놓아야 하며, 첫 번째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가 아니라 에밀 레이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한동안 화제가 됐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George Miller, 2015)를 드디어 봤는데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매드 맥스>는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영화들 중 <달세계 여행 Le voyage dans la luna>(George Méliès, 1902) 다음으로 특수 효과라는 것을 과감하고 아름답게 사용한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그 표면에 전혀 매혹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너무 재미있게 봤지만, 마지막 쑈트가 지나난 직후에는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냐 아니냐를 놓고 앞서 벌어졌던 일련의 논쟁 비스무리한 것들(당연하게도 이게 페미니즘 영화일 리가 없다)에 대해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게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물론 이 영화와 그 영화는 다른 영화이기 때문에 단지 영화들 사이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차이가 영화 사이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거의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는 사실 아직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 영화가 왜 좋은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보다 이 영화가 어째서 이토록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힘든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는 예전의 내가 좋아했던, 지금도 충분히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을 표면에 다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자 애니메이션이 이제 영화에서 단지 쑈트에 현실감을 더하거나 과장할 것을 과장하고 빼야 할 것을 빼는 정도를 지나 인위적으로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이때 만들어진 다른 수많은 영화들을 다 챙겨보지 않아도 <매드 맥스>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분명 내가 느꼈던 ‘그’ 희열의 한 구석이 남아있다. 문제는 이 희열이 예전처럼 같은 영화를 몇 번씩 반복해서 보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 기억될 만큼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어떤 근본적인 쟁점들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매드 맥스>를 본 직후에 닥쳐온 그 무감각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기로 했는데, 영화가 그저 시각적인 유희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영화를 왜 보는가? 나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싸이파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며 우회로를 택하려고 한다. 싸이파이 영화는 ‘과학적 공상’을 포함한 영화이며, 다소 필연적으로 미래의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싸이파이 영화들은 주로 21세기를 배경으로 그야말로 공상적인 과학 기술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은 지금 보기에는 대개 빗나간 예측이거나 지나치게 촌스러운 것일 때가 많다. 21세기 들어, 특히 2010년대 이후로 싸이파이 영화들은 도리어 더욱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할 때가 많아졌다. 이런 영화들의 배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다. <브라질 Brazil>(Terry Gilliam, 1985)이나 <제5원소 The Fifth Element>(Luc Besson, 1997)에서처럼 미래 인간들이 정체불명의(그러면서도 확실히 멋지기는 하다) 의상을 입고 나오는 경우는 이제는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즘 싸이파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 기술’의 절반 정도는 실제로 거의 상용화 단계에 이른 것들이 많다. 예컨대 <엘리시움 Elysium>(Neill Blomkamp, 2013)에서 맥스(맷 데이먼)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방사능 처리실에 갇히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이것은 흔히 일어나는 산업 재해의 다소 집약적인 버전에 불과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엑소스켈레톤(exoskeleton)을 장착한다. 이 엑소스켈레톤이라는 것은 일종의 입을 수 있는 로봇으로, 아직 널리 상용화되지는 않았지만 군인들의 전투력을 높이거나 보다 실용적으로는 같은 동작을 반복해 수행해야 하는 육체 노동자나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물론 영화에서는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맥스에게 이것을 장착시킨다). 다소 상상해내기 쉬운 기술이 등장하는 대신 이런 영화들은 이런 기술들을 완결되고 세밀하게 보여주는 데에 굉장한 노력을 들이는 것 같다. 그것은 그만큼 일종의 유행을 따라가는 듯한데, 나의 제한적인 관람폭에도 불구하고 폴리 사운드의 질감 같은 것은 거의 매년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려내는 기술의 비주얼을 가장 멋지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싸이파이 영화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싸이파이 영화는 왜 그토록 표면, 소도구, 특수효과에 집중하는 것인가? 훌륭한 전자 애니메이션 기술이 사용됐다는 것이 곧 그 영화가 훌륭한 영화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요즘의 액션이 포함된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는 대부분 전자 애니메이션으로 (문자 그대로) 채워져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 헐리우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조금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영화의 위기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우수한 전자 애니메이션은 (<매드 맥스>에서처럼)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면 구현이 불가능한 화면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데다가 많은 면에서 더욱 효율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훌륭한 전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일이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일과 같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즉, 위 문단의 질문—이 영화들은 왜 그렇게도 표면에 집중하는가?—을 왜 헐리우드 영화들은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는 훌륭한 전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가라고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떤 것일까? 내가 최근에 본 몇 편의 영화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영화들이 모두 끔찍한 영화들이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매드 맥스>는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고 심지어 보는 동안 굉장히 재밌기까지 했지만 결국 아무런 감흥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이 이내 밝혀졌다.실은 이것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매드 맥스>를 본 다음 날 본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 The Hunger Games>(Gary Ross, 2012)는 캣니스(제니퍼 로렌스)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너무 지루하고 이런저런 문제 투성이여서 절반도 보지 못했을 영화다. 이 두 영화들보다 꽤 오래 전에 본 <종이 달 紙の月>(요시다 다이하치, 2014)이라는 영화는 정말이지 치를 떨면서 보았고 <한여름의 판타지아>(장건재, 2014)도 별다를 바 없었다. 특히 방금 언급한 이 두 영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설명할 것이다. 이 영화들을 보며 이 영화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일은 사실 퍽 재밌는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한편으로 영화가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관심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어떻게 해야 영화가 훌륭해지는가란 질문보다는 이쪽이 훨씬 대답하기 간편할 것이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헝거 게임>은 굉장한 성공을 거둔 프랜차이즈 영화의 첫 편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와 제니퍼 로렌스가 출연한다는 등의 몇몇 정보 외에는 아무런 사전 지식을 가지지 않은 채로 보았다(나는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까지도 이것이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 같은 판타지 영화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특히 이 영화가 촬영된 방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무엇보다 헝거 게임에 참가하기 전까지와 그 게임이 시작된 뒤의 촬영 방식에서 아무런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헝거 게임이 시작되고 나면 영화에 나타나는 많은 쑈트들은 게임장 곳곳에 미리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통해 중계되는 것이라는 것을 게임 통제 센터에서 찍은 쑈트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쑈트들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만큼 너무나 안정적으로 인물들을 담아내서 도저히 미리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가 공간 이곳저곳을 마구잡이로 이동하는 인물을 찍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 외에도 이 영화는 세계관 설명에 놀라울 만큼 불친절한데, 내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생략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개연성을 빼앗아가는 일이었다. 세계관을 설명하는 고정된 카메라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지독한 핸드 헬드 촬영이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고향인 제12구역에서 출발해 판엠의 수도 캐피톨로 가는 캣니스를 원샷으로 찍는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핸드 헬드 촬영을 일삼는데, 이 촬영은 무엇보다 머리를 너무 어지럽게 하고(나는 <클로버필드>를 볼 때도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다) 캣니스라는 인물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나는 그보다는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고 어떤 시스템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것인지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라도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해야 했다.

<종이 달>과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묶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두 영화 모두 결정적으로 마음을 떠나게 한 하나의 쑈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 달>은 버블이 꺼져가던 1996년의 일본에서 리카(미야자와 리에)라는 사람이 허영에 빠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돈 씀씀이가 커지는 것과 동시에 외도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이 과정에는 맥락이나 근거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외도 상대인 코타(이케마츠 소스케)와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몇 번 마주치고, 그 뒤에 슬로 모션이 걸린 클로즈업 쑈트가 등장하는 동시에 앰비언스 사운드가 사라지고 도발적인 전자 음악이 그 자리를 채우는 식이다. 이러한 연출이 인물의 선택과 그 근거에 대해 무엇을 설명하는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촌스럽기까지하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이런 식—인물의 동기를 설명해주지 않고 결심과 행동만을 보여주는 식—으로 편집해 놓은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고 넘어가 보기로 했다. 이윽고 영화의 후반부가 되어 모든 것이 밝혀지고, 직장 선배와 독대한 자리에서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리카가 대답하는 장면이 등장했기에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곳이 되겠구나 생각하며 한껏 집중했다. 그런데 영화는 비겁하게도 리카가 첫 번째 외도를 하고 집에 돌아오던 아침으로 플래시백 하더니 손가락을 휘적이며 하늘에 떠 있던 달을 지우는 것을 리카의 시점 쑈트로 보여주었다. 그때 리카는 깨달았다고 한다, 모든 것은 가짜라는 걸(이 대사를 치기 직전에 플래시백이 끝나고 우리는 그 방으로 돌아왔다). 모든 생략과 점프를 설명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이 쑈트를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해냈고(아무 것도 표현하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당연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 인물과 이야기에 대한 내 신뢰는 여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려 버렸다.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두 번째 파트의 후반부에서 유스케(이와세 료)가 혜정(김새벽)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이전까지 영화를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보고 있는 편이었다. 특히 고조 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몇몇 장면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흥미로웠으며, 홍상수의 영화와는 분명 어딘가가 다르긴 했다. 그런데 문제의 이 장면에서, 혜정은 유스케의 팔에 펜으로 연락처를 적어주고 이 틈을 타서 유스케는 혜정에게 키스한다. 김새벽에게 예고하지 않고 이 키스씬을 찍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다가 알게 됐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많지만 일단 제쳐두더라도 도대체 왜 이들은 전화기를 사용해 연락처를 남기지 않는가? 2010년대 중반에 그게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 연락처를 전해주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당연히 그런 방법을 택할 때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씬에서 그 이유라고는 ‘키스를 하기 위해서’ 밖에는 없어 보인다. 순전히 로맨스 영화의 어떤 항목을 만족시키겠다는 것은 어떤 불필요한 행동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것은 이 영화가 유지하려고 애쓰던 쑈트의 흐름, 담아내려고 애쓰던 고조 시의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물론 이것들에는 프로덕션 상의 실용적인 요인들이 더욱 크게 작용했겠지만). 따라서 나는 이 장면을 곱씹어 보며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기억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위에서 필요 이상으로 전자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에 대해 길게 늘어놓은 감이 있는데 하여간 앞의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나는 처음에는 예전의 내가 주로 보고 훌륭하다고 느낀 영화의 구석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돌연 그것이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된 순간에 대해 짧게 서술해 보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아무튼 이를 계기로 해서 최근에 본 몇 편의 영화들이 하나 같이 무너져내린 과정을 되새겨 보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리바이어던 Leviathan>(Lucien Castaing-Taylor·Verena Paravel, 2012)처럼 마법 같은 순간들을 느끼게 해준 영화들이 있고 그것들을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되돌아 보면 예전만큼 영화를 재미있게 보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상한 현상은 그냥 내가 예전에는 별 희한한 영화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도 그저 넘어갈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찌 됐건 간에 영화는 ‘내가’ 보는 것이고 그런 영화들을 좋아했던 것조차 개인적인 영화의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비교적 짧게 덧붙이려고 하는데, 바로 영화에서 어떤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떤 문제들이 새롭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것이다. 지난 학기에 세르주 다네의 「<카포>의 트래블링」이라는 글을 읽고 거기에 대해 수업을 들으면서,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의 극장에 ‘도덕’이라는 좌석이 새롭게 마련된 것이다. 비로소 나는 이 좌석에 앉아 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들을 전적으로 거부할 수 있게 됐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이 좌석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했을 때 그 외에 믿을 만한 기준은 내게는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 외에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내면의 판단에 기초한 도덕이, 내가 믿고 따르는 편인 어떤 이데올로기와 뒤섞이거나 충돌할 때에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가령, <매드 맥스>가 페미니즘 영화인가 하는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어떤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가 되려면 가부장제에 찌든 지금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가, 페미니즘적인 의미에서 이상화된 사회를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회가 그렇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내가 내리는 어떤 판단이 온전히 나의 의지와 도덕적 토대에 기초한 것인지, 내가 믿는 이데올로기의 하나의 발현으로 튀어나오는 것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때에 나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무기한 보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해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불균질한 영화를 애써 평평하게 만들고, 그러므로 어떤 영화를 축소시키거나 그 영화에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어떤 이데올로기는 이미 내 의식의 일부이며 곧 나의 일부이며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비평을 스스로 검열하고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두 번째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한계를 알면서도 그러한 비평을 해나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가(그것을 비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 사이에서 사실상 길을 좀 잃은 상태다.

당장 여기에 대해서 고민하자면 밑도 끝도 없는, 그것과 별 관계도 없어 보이는 고민들이 이어진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것으로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인가? 요즘 넷플릭스에서는 소비자들의 시청 패턴을 분석해서 자기들이 제작하는 드라마 스크립트 쓰는 일을 반쯤 자동화했다던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 영화가 더 이상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 제작에 찾아온 많은 변화들은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발로라고 보아도 될텐데 지젝을 좀 읽어 보아야 하나? VR(Virtual Reality) 기기가 상용화되면 영화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때에는 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정표가 되어 줄 만한 어떤 계기나 영화들이 필요할 것 같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아직 내가 보지 않은 영화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들을 모아야 한다

도시가 스스로의 청결을 유지하는 기본 전략은 더러운 것들을 한 군데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아무 데나 쓰레기와 담배 꽁초를 버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곳곳에 쓰레기통과 재떨이가 있어야 한다. 각 사람이 선진적인 시민 의식을 갖추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다. 얼마 전 기숙사의 쓰레기통이 절반 이상 줄고 출입구 앞 재떨이도 없어졌는데 이해하기 힘든 행정이다.

신문사 홍보 자료를 만들어 보았다


라요 바예까노의 2015-16시즌 어웨이 유니폼


지난 7월 1일에 에스빠냐 축구 클럽 라요 바예까노의 2015-16시즌 어웨이(두 번째) 유니폼이 공개됐다. 여섯 색의 사선 줄무늬에는 일곱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빨강은 암 투병 중인 사람들을 지지한다. 주황은 장애인 차별 폐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노랑은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초록은 환경 보호를 위해 나선 사람들을 지지한다. 파랑은 아동학대와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보라는 성폭력과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각각의 색들로 이루어진 무지개색은 LGBT를 지지하는 ‘그’ 무지개색이다.

잡념이 많아서


여행이 끝나고 서울에서 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날을 보내자니 온갖 잡념이 몰려와 살기가 힘들다. 며칠 전부터는 입 안이 지끈거리며 아팠는데 거울로 안쪽을 살펴보니 사랑니가 올라오는 것 같다. 도대체 사랑니는 왜 나는가? 내가 찾은 치과의사가 단지 돈 때문에 사랑니를 뽑아야 한다고 권할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수술을 하다가 얼굴 신경이 눌려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아랫입술에 불편한 감각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등의 일어나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하는가? 따위의 걱정이 가시질 않는다. 사랑니뿐만 아니라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다.

이제 짧은 글을 쓰는 것조차 힘들다. 나는 아직 눈앞에 도착하지 않은 일들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문장을 어떤 순서로 배치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소하면서도 중대한 문제들이 나와 함께 있다. 가령, 종일 누워 있었기 때문에 앉거나 서거나 걸어다니기로 마음을 먹더라도 나는 곧 다시 눕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누우면 허리가 아프다. 게다가 손을 아무리 씻어도 손바닥은 이유 없이 따갑다. 이불을 덮으면 덥고, 그러지 않으면 춥다. 이런 문제들은 누가 누구를 싫어한다든가 따위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나쁜 꿈을 자주 꾼다. 한 번은 고등학교 3학년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꿈 속의 친구들은 그때 친구들이 아니었다. 학교는 우리들이 모든 종류의 팔찌를 착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우리는 곧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는데 나는 그때만큼 빠르게 뛸 수가 없었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악몽을 꾸었다. 그것들이 전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나쁘게 여겨진다. 오늘도 나쁜 꿈을 꿀까 걱정하며 편히 잠들지 못하는 것이 일상적인 재앙이 되었다.

저번에는 누군가가 몰상식한 일을 내게 저질렀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거기에 예상 외로 매끄럽게 대처한 편이다. 그러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여간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대개 얼마쯤 뒤늦게 깨닫는다. 그때 앞장서는 것은 공포다. 하지만 막상 닥치면 별 것도 아니거나 해 볼 만한 것이라는 걸 나도 대강은 짐작할 줄 안다.